[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당신이 배를 사주면 영국수출보증기구의 승인을 얻어 영국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이 돈으로 이 사진 속 백사장에 근사한 조선소를 지어 당신 배를 멋지게 만들어 주겠소. 나를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조선소보다 더 멋진 배를 다른 데보다 더 싸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만일 배가 맘에 안 들 것을 대비해서 우리나라에서는 반대급부 지불보증서를 제출할 것이고, 이것이 손해배상을 보증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단순한 보상이 아니라 계약금은 물론 중도금 등의 원금과 이자까지 가만히 앉은 채로 받을 수 있게 은행으로 송금해주겠소. 정주영은 이런 미친 설득을 선주들에게 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런 설득이 쉽게 먹혀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그야말로 사생결단하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일까?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꼭 정주영처럼 미친 사람이 하나 있었다. 1세기 가까이 해운업을 해오는 그리스의 리바노스였다. 그는 한때 처남인 선박왕 오나시스를 능가하기도 했던 거물 해운업자였다. 리바노스는 정주영이 보여준 미포만 백사장 사진만 보고 선뜻 계약했다. 리바노스는 파격적으로 26만 톤짜리 배 두 척을 만들어 달라고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명예교수] 평양종은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다. 원래는 대동문 루 안에 매달려 있었는데 1714년에 평양성 북성을 고쳐쌓으면서 북장대로 옮겨갔다가 거기서 화재가 일어나 깨지고 1726년 약 4달 동안 청동을 녹여 부어 다시 만든 것이 지금 있는 평양종이다. 종의 크기는 직경 1.6m, 높이 3.1m, 무게 13.5톤이며 종의 겉면에는 중앙부에 세 줄의 띠가 들러 있고, 이를 중심으로 상부와 하부가 각각 2등분 그리고 천판을 합하여 5등분 되어있다. 맨 위의 고리부분을 용트림으로 새기고, 상단에는 관음보살상, 하단에는 8괘와 능형의 구름무늬를 새겼다. 종에는 여러가지 무늬와 종의 내력에 대하여 쓴 글 등이 새겨져있다 균형 잡힌 형태, 종머리에 틀어 올린 용틀임 조각은 통이 크면서도 섬세하다. 보통 때에는 밤 10시와 새벽 4시에 쳤다고 한다. 종이 밤 10시에 28번 울리면(이것을 인경이라고 하였다.) 평양성 내성 4개의 큰 문이 동시에 닫혀 통행이 금지되었으며 새벽 4시에 33번 울리면(이것을 파루라고 하였다.) 성문이 열려 사람들이 통행하였다. 1890년대까지는 비상경보와 시간을 알려줄 때도 쳤다. 보물1호에서 국보유적 제23호
[그린경제/얼레빗=성제훈 기자] 오늘 아침 텔레비전에서 낙지가 피로회복에 좋다.라고 했습니다. 피로를 회복해서 어디에 쓰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원기를 회복한다면 몰라도... 제가 일하던 옮기기 전 수원의 농촌진흥청에는 서호라는 호수가 있습니다. 일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1분만 걸어가면 있었지요. 그 호수는 정조대왕이 판 호수인데 그 호수 둑에는 소나무가 몇 그루 있습니다. 정조가 호수를 판 뒤 농사짓는 백성이 편히 쉴 수 있도록 그늘을 만들고자 심은 소나무라고 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호숫가를 돌면서 산책을 하다가, 왜 죄 없는 나무에 대고 배나 등을 치느냐는 겁니다. 나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제 생각에 그냥 흙을 밟고 걷는 것만으로도 몸에 좋을 텐데, 왜 굳이 나무에 몸을 부딪치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그냥 서 있는 사람을 툭툭 친다면 좋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배나 등이 가려워서 그러실까요? 어렸을 때 소가 가끔 담벼락이나 짚단에 몸을 비비는 것을 봤습니다. 그건 아마 가려워서 그랬을 겁니다. 그게 바로 '비게질'입니다. 말이나 소가 가려운 곳을 긁느라고 다른 물건에 몸을 대고 비비는 짓이죠. 산책하시면서 소나무에 몸을 비비고 치시는 분들을 보면 두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때는 세종 12년인 1430년 5월 어느 날이었다. 충청도 어느 시골 허름한 집 앞에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웅성거렸다. “어머머. 우리 임금은 역시 성군이셔. 토지세에 관한 법을 만드셨는데 집집마다 그 법에 대한 의견을 들으신대.” “우리 같은 무지렁이한테도 의견을 듣는 세상이라니. 참 살기 좋은 세상이네.” 모인 백성들은 상기된 얼굴로 한 마디씩 하느라 즐거운 표정이었다. 관청에서 관리가 어떤 종이에다가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찬반 의견을 묻던 중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 여론 조사였다. 세종은 관리의 부정으로 농민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는 논밭에 대한 세금 제도(전세제도, 공법)를 개혁하기 위해 1430년(세종12) 3월부터 8월까지 여론조사를 했다. 전국 17만여 명의 백성이 투표에 참여하여, 9만 8,657명이 찬성, 7만 4,148명이 반대하는 결과를 얻어 냈다. 세종은 밥은 백성의 하늘이라고 했을 만큼 먹고 사는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농사짓는 법을 잘 가르쳐 농사를 과학적으로 짓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농사짓는 땅에 대한 세금을 백성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세종이 임금이 된지 4년째 되던 1422년 음력 1월 1일. 달이 해를 가리는 일식이 일어날 때가 되자 세종을 비롯한 많은 신하들은 초저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종은 하얀 옷을 입고 인정전의 제단 위에 올라가 일식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많은 신하들도 하얀 옷을 입고 임금 곁에서 임금과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며 서 있었다. ▲ 고려 사람들은 물동이에 물을 담고 해가림(일식)을 보았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 개기일식 모습(왼쪽), 일식장면을 관찰하는 모습(《일식과 월식 이야기》- 나일성.이정복) 일식 계산을 담당한 이천봉 과학자는 더욱 초조했다. 미리 계산한 것에서 어긋나면 큰일 나기 때문이다. 결국 일식은 계산한 시간보다 무려 15분 늦게 일어났다. 이때는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원리를 파악하여 표준 시간을 정하는 것은 중국 황제의 권한이었다. 따라서 중국에서 만든 천문학책인 역법서를 들여다 사용하니 오차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하늘은 중국의 하늘이 아니었다. 역법서를 중국에서 들여온다 해도 조선 하늘의 움직임을 알고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조선 임금만의 특권이었기에 세종은 하늘이 돌아가는 것을 정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때는 조선시대, 1434년 어느 겨울. 하루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어스름이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해가 더욱 짧았다. 남루한 한 상인이 한양 도성을 향해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성남 남한산성 근처 모란 시장으로 물건을 팔러 나갔던 이막동이라는 상인이었다. 한양(서울) 도성 근처에 왔을 때 도성 쪽에서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아이쿠.. 큰 일 났다. 곧 도성 문이 닫히겠구나. 얼른 뛰어가야겠다. 다행히도 상인은 종이 열 번 정도 울렸을 때 도성문에 도착했고 아슬아슬하게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들어오고 한 숨 돌렸을 때 28번의 종소리가 끝이 났다. 그 상인은 성 안 한양 시장이 있는 운종가(지금의 서울 종로) 종루 근처에서한 동료 상인의 집에서 잠을 잤다. 새벽이 되자 종루의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또 다른 장이 열리는 이천 쪽으로 가기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났다. 꼬끼오 닭이 우는 새벽이었다. 33번 울리자 성 밖으로 나서기 위해 길을 재촉했다. ▲ 조선시대 4대문의 하나인 숭례문, 4대문은 도성을 드나들 수 있는 문으로 33회의 파(바라)와 28회의 인정(인경)을 쳐서 성문을 여닫았다. 이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사실 정주영이 조선소를 만들겠다고 한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1960년대 말 조선소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때는 단순히 생각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1070년대 초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불렀다. 청와대로 들어간 정주영에게 박 대통령은 다짜고짜로 조선소를 만들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곧 준공될 포항제철에서 생산되는 철의 소비처가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김학렬 부총리가 정주영에게 조선소 건설을 타진했지만 거절한 상태였다. 아니, 정 회장. 한 나라의 대통령과 경제 부총리가 적극 지원하겠다는데, 배짱도 없이 쉽게 포기해 버려요? 내 체면을 봐서라도 해봐야지. 어디 대통령 망신시키기로 작정이라도 한 거요? 박 대통령이 정주영에게 그렇게 노발대발하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정주영의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박 대통령이 담배를 권하자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면서 고민하던 정주영은 조선소 건설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왕 할 바에야 보란 듯이 해버리자고 생각했다. 대통령의 압력으로 마지못해 했다는 소리는 듣기 싫었다. 사실 조선소 건설은 삼성 이병철에게 거절당한 뒤 정주영에게 밀려 온
[오늘 토박이말]묵주머니 [뜻]2)뭉개고 짓이기거나 하여 못 쓰게 된 몬(물건)을 빗대어 이르는 말[보기월]이렇게 가면 두면 우리말이 묵주머니가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작은 나라라고 하는데 고장마다 날씨가 다른 것을 보면 작지 않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하늘이 맑았는데 한밭(대전)을 지날 때는 발비가 내렸습니다. 그리고 좀 더 가니 비가 안 오다가 서울에 닿았을 땐 또 내렸습니다. 가는 김에 우리말글을 사랑하는 분들을 만나 뵙고 왔습니다. 우리말글을 챙기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져 여러 사람들이 여러 곳에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더 나아가 토박이말을 챙기는 일에도 마음을 써 주는 분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하기야 가르치는 일을 하는 분들 가운데도 많지 않은데 배곳 밖에 계신 분들이 움직여 주길 바라는 것이 지나친 바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르치는 길(교육과정)을 새로 닦는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들어보러 갔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살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알고 보니 책집(출판사)에서 오신 분들이 많았다고 하더라구요.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습니다. ^^
[그린경제/얼레빗=이규봉 교수] 러시아의 수학자 로바체프스키는 1829년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관한 최초의 논문 기하학의 원리에 관하여를 러시아어로, 1840년 평행선 이론에 대한 기하학적 연구를 독일어로 발표하였다. 여기서 그는 평행선의 존재를 하나 이상으로 가정하였다. 헝가리의 볼리야이도 로바체프스키와는 독립적으로 1832년 만일 한 점을 지나 주어진 직선과 평행인 직선이 하나 이상 있다라는 가정 하에 모순이 없는 새로운 기하학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엄청난 비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이미 3년 전에 로바체프스키가 러시아 잡지에 발표했음을 알고 볼리야이는 정신적 우울증에 빠져 더 이상 연구를 발표하지 않았다. 독일의 가우스도 독립적으로 볼리야이가 의문을 제기하기 전에 이미 새로운 기하학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연구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고 그의 사후에 알려지게 되었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보다 작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평행공준 대신 한 점을 지나고 주어진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두 개 이상 존재한다.라는 가정아래 생성된 기하학을 로바체프스키 기하학이라 한다. 이 기하학이 성립하는 모형으로 공의 안쪽이나 나팔의 겉 표면을 들 수 있다. 아래 그
[그린경제/얼레빗=리창수 기자] [오늘 토박이말] 묵이 [뜻]오래 두었던 몬(물건)이나 오랫동안 치르지 않았던 일 [보기월]그렇게만 되면여러 해 묵이를 끝낸 것처럼 시원할 것입니다. 어제 아침에는 여느 날과 달리 일찍 눈이 뜨였습니다. 일찍 잠을 잔 것도 아니어서 왜 그런지 궁금했습니다. 아침을 챙겨 먹고 배곳 가는 길에 졸음이 쏟아졌습니다. 마치 간밤에 잠을 자지 못한 것처럼 말이지요.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잠가락이 깨져서 그럴까요? 토박이말바라기 갈모임(학회) 채비를 하나씩 해 나가고 있습니다. 모시는 말씀을 만들어 누리집에도 올리고 곳곳에 널리 알렸습니다. 그걸 보신 많은 분들이 그날 자리를 함께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말입니다. 한 분씩 한 분씩 뜻을 같이 하는 분들이 늘고 있어서 일을 하는 맛이 납니다. 머지않아 여러분들을 깜짝 놀라게 할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가르치는 길(교육과정)을 새로 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능을 두고 여러 사람의 슬기와 힘을 모아서 좀 더 탄탄하고 바른 길을 내 주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삶의 바탕인 말을 가운데 두고 여러 배움가지들을 챙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