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김리박 시조시인] 목숨으로 믿나라 지킨 나랏이들 믿나라는 얼넋이요 내 목숨은 오직 하나 그 사이서 살고 죽는 가냘픈 삶이건만 죽삶은 두 갈래 있어 썩음과 횃불이라 * 믿나라 : 조국,본국,모국 * 얼넋 : 혼백 * 죽삶 : 인생 다 아는 바와 같이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오늘의 우리 살림은 지난날에 견주어 아주 유족하게 되었다.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 믿나라와 한겨레를 위해서 생명을 다 바쳐 싸워 희생되신 분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참사람은 살아도 곱게 살고 죽어도 곱게 죽는다. 우리의 오늘의 삶도 희망도 꿈도 그분들이 흘리신 피밭 위에서 피어 있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아니 된다. ▲ 김미경 화가가 순국선열을 생각하며 그린 통곡의 나무
[그린경제/얼레빗 = 김슬옹 교수] 자판은 정보시대 글쓰기와 정보 입력의 핵심 도구이다. 스캐너나 음성 인식이 발달하고 손으로 쓰는 최첨단 컴퓨터까지 개발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자판의 중요성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자판이 어떻게 설계되었느냐에 따라 정보 생산성의 속도와 양이 결정되고 건강문제(키펀치병 따위)까지 좌우되기 때문이다. 자판은 그 물질성과 습관성의 강고한 결합으로 한 번 정해지면 바꾸기 어렵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표준화가 중요하다. 자판 입력의 역사 한글 자판은 현재 한국의 두벌식, 세벌식 그리고 북한의 두벌식 자판 등이 쓰이고 있다. 남한의 표준 자판은 두벌식이다. 이는 한글 모아쓰기에서 자음과 모음의 관계에 따라 발생하는 한글만의 독특한 문제다. 타자기는 자판의 한글 배열 방식에 따라 크게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초성-중성-종성의 삼분법의 특색을 살리면 세벌식이요, 자음-모음의 이분법을 따르면 두벌식이요, 초성 자음, 종성 자음, 종성 없는 모음, 종성 있는 모음과 같은 사분법을 따르면 네벌식이다. ▲ [표 1] 자판 벌식 구별 글쓴이는 고등학교 때(1977-1979) 표준인 네벌식 타자기를 배웠다. 대학에 들어가 세벌식이 더 합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5. 나라의 위급상황을 알렸던 목멱산(남산) 봉수대 (木覓山 燧烽臺) *서울 중구 예장동 8-1(시도기념물 14)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후 목멱산(木覓山, 남산)에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전국의 봉수가 최종적으로 모두 목멱산 봉수대에 전달되도록 하여 남산 봉수대는 중앙 봉수소로서 중요한 위치였다. 목멱산 봉수대는 갑오개혁 다음해인 1894년까지 거의 500여 년 동안이나 쓰였는데 봉수대의 이름은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京燧烽)라고도 하였다. 목멱산 봉수대는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5개소가 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현재 남산 봉수대는 《청구도》 등 관련자료를 종합하고 고증하여 현 위치에 1개소를 복원한 것으로 서울시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다. 봉수란 근대적 통신수단이 발달하기 전까지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국가적 통신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제도이다. 변방에서 긴급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그 사실을 가까운 관아와 해당 지역에 신속하게 알려 위급한 사태에 빨리 대처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러 곳에 설치한 봉수대를 이어달리기 식으로 나
[그린경제/얼레빗 = 홍사내 기자] 훈민정음이 과학적이고 훌륭한 글자라고 하는 것은, 그 만든 사람과 만든 때, 만든 원리가 뚜렷하고, 창제 원리의 논리 체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며, 세종의 주체 의식과 백성 사람 통치 철학이 깃들어 있어 훌륭한 글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밝혀진 기록으로는, 그가 언제부터 어떻게 언문 창제 작업을 하였는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집현전 학사들이나 신하들이 모르는 동안 집안에서 자식들과 의논하면서 비밀스럽게 작업하였다는 것 정도이다. 최만리의 상소에서 이제 널리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지도 않고 갑자기 구실아치 10여 사람에게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해 놓은 운서(韻書)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가져다 붙이고 장인(匠人) 수십 사람을 모아 나무판에 새겨 떠서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천하 후세의 공의(여론)가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한 말이나, 왕세자에게 글자 만드는 일을 의논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창제한 사실을 밝힐 때까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의공주에게 장가든 안맹담의 집안 죽산안씨대동보의 기록에는, 훈민정음을 만들 때 세종이 변음(變音)
[그린경제/얼레빗 = 이무성 한국화가] ▲ 모하비 사막에서 발견한 태극기, 한국인 부동산 가게 ▲ 1850년 세웠다는 샌프란시스코 시청 앞 동산, 이곳에는 일요일마다 먹거리장터가 열리고 있다. ▲ 흉악범들을 가뒀던 곳으로 유명한 교도소가 있던 알카트라섬 영화 빠삐용도 이곳에서 찍었다고 하며, 지금은 관광지로 한몫 하고 있다. ▲ 장관인 요새미티 국립공원 ▲ 요새미티 국립공원에서 인증사진 한장
[그린경제/얼레빗 = 리창수 기자] 오늘 토박이말 길미 * 뜻 :1)이익, 2)이자 * 보기월 : 제가 그 어떤 길미를 바랐다면 이 일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젯밤 바람을 맞으며 마실을 갔을 때 본 하늘이 참 맑았습니다. 별은 어찌 그리도 환하게 빛나던지요. 마치 윤슬처럼 빛나는 별들을 보며 히야 좋다~라는 말을 되뇌기도 했습니다. 옅은 구름들 뒤에 있는 하늘은 어젯밤 그 하늘인가봅니다. 참 푸릅니다. 파란 하늘같은 반가운 기별을 받아 기분까지 좋은 아침입니다. 한국문화신문 얼레빗에 글을 실어 달라는 기별이 왔습니다. 많이 모자라고 보잘 것 없는 글이기에 부끄럽지만 더 많은 분들께 토박이말을 맛보여 드릴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제 누리집을 만들어 토박이말을 알리는 일을 하고 나서 제 글을 보내달라고 한 곳은 '얼레빗'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더 뜻이 깊습니다. 제가 그 어떤 길미를 바랐다면 이 일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 돈을 들이기도 했지만 둘레 여러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누리집도 고쳐 지을 수 있었으며, 토박이말 익힘책, 딱지도 만들었고 토박이말 겨루기, 토박이말 *토리몬(캐릭터) 모으기(공모전)도 할 수 있었습니다. 토
[그린경제/얼레빗 = 양병완 기자]판소리라는 말은 판놀음에서 부르는 소리(노래)를 말한다. 옛날 문헌에는 이러한 의미의 판소리를 잡가(雜歌), 타령(打令), 창가(唱歌), 극가(劇歌), 본사가(本事歌)등으로 표현하였다. 판놀음이란 원래 넓은 마당을 놀이판으로 하여 판을 짜서 놀이를 벌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판놀음에는 판소리, 풍물굿, 줄타기, 소고놀이, 춤, 염불 등인데 판놀음으로 놀 때는 판자(字)를 붙여서 판소리, 판굿, 판줄, 판소고, 판춤, 판염불이라고 불렀다. 판소리는 원래 창우(唱優), 광대(廣大)등으로 부르던 소리와 재담(才談)과 춤과 곡예를 연희(演戱)하던 노릇바치가 부르는 소리에서 나온 말이다. 노릇바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광대 역시 그 솜씨에 따라서 소리광대, 대광대, 줄광대, 어릿광대 등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판소리는 여기에서 소리광대를 가리킨다. 본래 광대(廣大)는 첩리(帖裏)에 초립(草笠)을 쓰나 소리광대는 두루마기에 갓을 썼고 명창으로 뽑히게 되면 판소리 창(唱)옷에 통영갓을 쓰기도 하였다. 판소리는 가객(歌客) 한 사람이 긴 서사적(敍事的)인 사설을 아니리(대화체의 말), 소리(판소리), 발림(몸짓)으로 연출하는 극적인
[그린경제/얼레빗 = 김보람 기자] 통영옻칠미술관옻칠아카데미창립1주년 기념식을 2013년 11월 7일에가졌다. 이날 기념식에는 옻칠아카데미 3기회원 뿐만 아니라 1기,2기강의를 들었던 분들 모두 참석하셔서 뜻깊은 자리였다. 김성수 관장님 께서는 무엇보다 기본 원리를 아는것이 중요하다 라며 또 한번 강조 하였다. 1년동안 옻칠아카데미를 이끌어온옻칠아카데미이채원 강사는 지난1년동안의 여러 장면들이 눈앞을 스쳐지나 가는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이날진주에서 강의를 들으러 오는 수강생은 시작할때 관장님께서 적어도 1년은 배워야한다고 하셨는데, 먼곳에서 다녀야 해서 내가 과연 1년을 채울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뒤돌아 보니 1년이 지나 있었다. 앞으로도 여러분과 쭉~함께 하고싶다 며 소감을 말했다. 기념식이 끝난 후에는 그동안의 수업을 돌이켜보는 영상을보면서수강생분들이 준비해온 음식을 나눠먹었다.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이번엔 전통춤을 추는 명인 후보를 소개한다. 한국무용의 정제된 멋과 함께 계곡 물 흐르듯 요동치는 춤사위로 한국무용의 참맛을 보여 온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보유자 후보(준인간문화재) 정명숙 명인이 추천하는 박지혜 씨다. 박지혜 씨는 고등학교 때 이미 한양대 콩쿨 최우수상을 받았고, 지난해 임방울 국악제 최우수상(장관상)을 받아 차세대 명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 춤은 어떻게 추게 되었나요? 어머니께서 춤을 무척이나 좋아하셨어요. 아마도 본인이 좋아하셨지만 외할머니의 반대로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을 딸인 제가 이루어주기를 원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7살 때 어머니께서 리틀앤젤스 비디오를 가져오셔서 보여주시고는 해보라고 하셨어요. 이후 잘 한다고 어머니나 어른들이 칭찬해주시는 게 신나서 학원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병원에서 퇴원한 날 춤 공부하러 갔을 정도로 우리춤을 좋아하셨습니다. - 정명숙 선성님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요? 영남대학교 국악과에 정재(궁중무용) 전공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대구시립국악단 공연에 선생님께서 특별출연하셨어요. 이때 저는 선생님의 춤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금옥(金玉)같은 우리 민족 적의 노예(奴隸) 되단말가 용봉(龍鳳)같은 당당사부(堂堂士夫) 적의 압제(壓制) 받단말가” 위 시는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 선생이 쓴 <분통가(憤痛歌)> 의 일부로 민족의 자존심을 갖고 당당히 살던 우리 겨레가 왜놈들 아래서 압제와 핍박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한 통한의 느낌을 써 내려간 시다. 조선의 당당한 선비였던 백하 김대락 선생의 후손 김시중 어르신을 찾아가던 날은 내앞마을 콩밭이 누렇게 익어가던 늦가을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었다. 전에 한번 찾아뵌 적이 있는 김시중 선생은 경북 안동 내앞마을(川前里) <백하구려(白下舊廬)>에 살고 계시다. ▲ 백하구려 전경 <백하구려(白下舊廬)>는 대한제국 시절과 일제강점기 초에 국민계몽과 광복운동에 몸 바친 백하 김대락(1845∼1915)선생의 고택으로 사랑채를 확장하여 1907년 이 지역 최초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를 개교했던 역사적인 유래를 간직한 집이다. 당시 협동학교의 교사로 쓰던 건물은 광복운동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처분되어 사라졌지만 지금도 건물이 서 있던 축대와 초석 일부가 사랑채 앞에 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