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지명순 교수] 저녁식사를 마친 주부는 사과를 껍질을 벗기고 조각을 낸 후 접시에 담아 텔레비전 앞에 있는 가족들에게 내놓는다. 식품전문가 못지않은 지식을 동원하여 사과를 만병통치약처럼 소개하고 먹기를 권유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드라마 속에 빠진 남편과 아이들은 아무 생각 없이 포크로 사과 한 조각을 쿡 찍어 입으로 넣을 뿐이다. 사과의 맛과 향을 음미하고, 사과의 존재, 자연의 경이로움, 농부의 수고에 대하여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 말이다. 한방에서는 약을 짓고, 달이는 정성은 물론이고 먹는 사람의 정성이 있어야 효과가 있다고 했다. 음식도 마찬가지이다. 사과 하나를 먹더라도 제대로 맛을 느끼고 몸에 들어가 좋은 기능을 내려면 사과와 사람 간에 존재를 인식하고 감사함으로 먹었을때 효과가 있을 것이다. ▲ 사과무 말앵이 무침 사과는 성질, 색, 맛, 재질, 향, 품종에 따라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여 세계적으로 700여종이 있으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생산지로는 충주예산대구 등이다. 달면서도 새콤한 맛이 좋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좋아하는 과일의 으뜸이다. 외국에서는 사과를 '다이어트 과일','청춘과일','지혜의 과일'혹은 '아름다움의 과일'이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한글을 아시나요?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도대체 한국 사람치고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한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어떤 사람은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는 것은 한글, 한국말을 잘 안다는 것이라고 꼬집는다. 초등학교부터 국어를 12년에서 16년을 배우고도 간단한 맞춤법 하나 모르는 것이 우리 실정이다. 그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특징이 무엇인지, 훈민정음이 언제 한글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는지, 한글날은 언제부터 지내왔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러니 한글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말글과 떨어져 살 수가 없다.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 말글 속에서 그냥 살아가기에 말글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아간다. 또 한글은 세계 언어학자들이 격찬하는 위대한 글자인데도 정작 우리는 그 위대함을 모르고 푸대접하며, 남의 나라 글자인 영어와 한자 쓰기에 더 골몰해 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글자이면서 한글이 왜 위대한지, 한글의 특성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훈민정음은 세종임금의 백성 사랑이 만든 작품 ▲ 훈민정음 해례본 먼저 훈민정음 머리글을 통해 창제의 동기와
[그린경제=전주연 기자] 지난9월 1일일요일 국제 에너지기구(IEA) 에너지 기술위원장 피터쿤즈씨가 서울에서 국제포럼 일정을 마치고 개인적으로 통영까지 내려와 통영옻칠미술관을 관람하였다. 한국옻칠회화와 옻칠공예를 감상하고 다양한 소재와 기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예술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예술가 집안에서 자랐다는 피터 쿤즈씨는 전시실과 회화 작업이 이루어지는 교육관을 둘러보며 처음 접한 한국옻칠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그린경제 = 최미현기자] 고종(재위 18631907)이 황제가 된지 40주년과 그의 나이 51세에 기로소에 들어 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비를 보호하는 비전(碑殿)안에 있다.이 비석에는 고종이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기로소(耆老所)는 정2품 이상의 문관 중 70세 이상 된 사람을 우대하는 제도로, 고려 때의 기영회를 계승한 관제이다. 조선 태조가 60세 되던 해에 친히 기영회에 들어갔는데, 이후 왕들이 오래살지 못해 기로소에 들어가는 이가 없자, 숙종과 영조 등이 60세를 바라보는 나이라 하여 미리 앞당겨 들어간 것을 본받아 고종은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51세에 들어가게 되었다. ▲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 ▲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 비석은 귀부, 비몸, 이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몸 앞면에는 황태자인 순종의 글씨가 있으며, 비문은 윤용선이 짓고 민병석이 썼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정자(停子)형 건물로 건물 기단 둘레에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 기념비석 이 건물의 남쪽에 설치한 문은 돌기둥을 세우고 철문을 달았는데, 문의 가운데칸에는
[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관동의 오래된 절 심대사와 오미쿠지의 창시자 원삼대사, 큰스님 만공상인의 조부모 사당 고하쿠신사와 조후시(調布市) 일대는 고대 조선인의 독무대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가 밝히고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이지 일본사람들이 밝혀내어 널리 알려줄 리가 없다. 오히려 있는 것을 감추고 없애지나 않으면 다행인데 그런 기대는 점점 멀어져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답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무사시노 평야에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와 집들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껴본다. 해가 지고 온 세상이 어두워지면 집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태양이 떠오르면 초원 위에 펼쳐지던 평야와 그 평원 위를 달리던 용맹의 상징 고구려 후예들과 뛰어난 선진문화의 전달자 백제와 신라인들의 영원한 로망이 밝은 햇살을 받으며 언제까지나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빌어본다. 이 글은 2010년 1월 23일 답사글이다. 고구려 총각 복만 씨의 전설과 마귀 쫓는 원삼대사의 전설로 잘 알려진 심대사(深大寺)는 관동지방의 천년고찰로 도쿄시내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사이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 어떻게 송서∙율창을 하게 되었나요? 97년이었어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전주대사습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때 유창 선생님이 경기민요를 했고, 장원을 받으신 거죠. 흔히 하는 말로 필이 꽂혔다고 하나요? 선생님이 민요 하시는 모습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결국 방송국에 전화해서 선생님 전화를 확인하고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무형문화재가 되시지 않았을 때라 제자를 받지 않고 있었지요. 누가 배우러 와도 아직은 내 공부하기에도 바쁘다며 거절하실 때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이가 그것도 대구에서 서울 독립문까지 찾아가 배우겠다고 하니 아마도 감동하신 모양이었어요. 흔쾌히 제자로 받아주셨고 이후 선생님께서 송서∙율창을 하시게 되어 저도 따라 하게 되었는데 제 귀에도 송서∙율창이 참 좋았습니다. - 유창 선생님 1호 제자로 들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선생님 곁을 떠나지 않고 그것도 아직은 국악 가운데서도 별로 알려지지 않는 송서∙율창을 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선생님은 저를 많이 이뻐해주셨어요. 아마도 어린 나이에 선생님이 이사
[그린경제=김동규 음악칼럼니스트] 이태리와 우리나라에 귀국한 후까지 셀 수 없이 많은 결혼식 축가를 부르면서 해프닝도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우리 풍속으로 함재비에 견주는 세레나데는 유럽에서 신랑이 신부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동네 사람들에게 신고식도 겸한 결혼 전야제인데 신랑이 노래를 못 부르면 돈을 주고 가수가 대신 부르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아주 친한 이태리 동네 친구의 세레나데를 내가 대신 불렀던 날, 노래도 내가 불렀고 신부도 내 노래들 듣고 허락했으니 첫 날밤 잠자리는 신랑이 내게 양보해야 한다고 진한 농담을 하여 모인 사람들이 박장대소했던 기억이 난다. 아베마리아 소동도 있었다. 나의 이태리 양아버지인 빈첸초의 딸 루치아가 결혼을 할 때였다.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를 라틴어로 불러주기로 오래전부터 약속했었는데 정작 동네 성당의 돈 아고스티노(Don Agostino) 신부님은 완고한 분이라 이 아베마리아가 세속음악으로 작곡된 것이라는 이유로 혼배미사에서 못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여러 번 신부님을 설득하였으나 꽉 막히신 분이라 나도 은근히 아집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수긍하는 척했다가 당일에는 혼배미사 중에 기습으로 신랑신부가 원했던 라틴어 아베마
[그린경제=김영조 기자]나주로 취재를 가기 이틀 전 남파고택 종손 박경중 선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나눔의 철학을 취재하신다고 하셨지요? 저희 집안에선 그리 대단한 나눔을 실천한 것도 아닌데 멀리서 오셔서 실망하시면 어쩌죠? ▲ 남파고택 전경 열 번의 취재에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러나 나는 남파고택에 뭔가 분명히 있다. 다른 종가와는 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란 이상한 확신이 생겼다. 더구나 이곳은 강릉 선교장 이강백 관장(한국고택협회 회장)의 추천이 있었지 않은가?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 종손의 이름을 따 박경중가옥이라 했지만, 최근 이 집을 지은 이의 호를 따서 남파고택으로 이름을 바꿨다. 영암군 금정면에 세운 휼민비 구휼 입증 소작인에게 송아지를 줘 기르게 해 저희 집안이 그래도 넉넉했을 때는 고조인 박(朴) 자, 재(在) 자, 규(珪) 자 할아버지 시절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군수를 지내셨는데 1860년 무렵 3~400석 규모로 천석 정도는 되어야 큰부자로 쳐줬을 당시로서는 그리 큰 부자는 아니었지요. ▲ 남파고택을 지은 박재규 선생(왼쪽)과 그 손자 박준삼 선생 ▲ 남파고택 현 종손 박경중 선생 그렇게 큰부자가 아니었음에
[그린경제=윤재환 기자] 부여를 찾는 대개의 사람들은 으레 부소산에 오른다. 아침 일찍 부소산에 올라 새벽안개가 덜 걷힌 백마강을 바라보며, 미처 알지 못하는 백제의 옛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 저녁 부소산에 오르면 반월루(半月樓)에 올라 부여 읍내를 내려다본다. 아담하게 명멸하는 가로등 불빛들이 나그네의 시선을 나름대로 사로잡는다. 그러나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든다. 눈에 확 띄는 유적도 없고, 왕도였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왜소한 읍내 탓이다. ▲ 신부여팔경의 제1경인 금성산에 올라 바라본 2010년 부여 읍내 그래서일까. 가람 이병기 선생은 낙화암이란 기행문에서 부여의 첫 인상을 이것이 과연 부여 고도(古都)란 말인가?라고 탄식했다. 왕도의 위용은커녕 작은 시골 읍내의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곳이 부여다. 그러나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1948년 자신의 출판사 동명사에서 펴낸 《조선의 고적》에서 부여를 이렇게 적고 있다. 고적이라 하면 묵은 자취요, 꿈된 옛날을 말하는 것이니까. 그것은 쓸쓸하고 서럽고 한탄을 자아내게 생겼을 것은 물론이지만, 개개의 고적이 죄다 추창 적막의 느낌을 주는 것으로 금새가 정해 있지 아니 합니다. -
[그린경제=김리박 시조시인] 고추잠자리 부끄러워 그러느냐 밸이 나서 그러느냐 살며는 몇 해 사나 가을은 한때인데 죽살이 돋고 지는 길 즐겁게 지내야지 * 밸 나다 : 부아가 나다 * 죽살이 : 인생. 생애 ▲ 부끄러워서 고추잠자리일까? (태양 - fugacity 블로그 제공) *** 김리박 : 대한민국 한글학회 일본 간사이지회 회장 재 일본한국문인협회 회장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선정 한국어어문 지킴이 (황금상) 2006년 일본 히라가타시 교육위원회 조선어강좌 특별강사 일본용곡대학(龍谷大學) 한국어강좌 강사 일본관서대학(關西大學)비교지역문화강좌 강사 누리편지 ribak@hera.eonet.ne.jp 손말틀 (일본) 090-8147-76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