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경제=윤재환 기자] 2002년7춸 30일 이른 아침.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문 앞으로 네명의 사람이 모였다. 화가 임옥상, 문화재전문감정위원 김영복, 건축설계사 최부득, 그리고 필자였다. 일행은 7시 20분에 부여를 향해 출발했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하늘을 몹시 찌푸렸고, 빗방울마저 오락가락했다. 10시 30분경 부영에 도착했고, 부여문화원 김인권 사무국장이 마중을 나왔다. 우리는 봉화대가 있는 금성산(121.2m)에 먼저 올랐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 부여가 손에 잡힐 듯 펼쳐져 있다. 백제 26대 성왕은 538년 도읍을 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 나라 이름도 남부여(南扶餘)로 불렀다. 당시 백제의 왕족들은 자신들이 북방의 부여 출신임을 확실하게 밝힌 것이다. 오늘의 부여라는 지명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백제 왕족들의 성(姓)이 부여였다는 것도 관련이 있는 듯싶다. 사비성은 부소산을 휘감아 돌며 쌓아졌는데, 마치 그 모양이 반달을 닮아 반월성(半月城)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와곽성이 사비성인데, 우리는 이를 부여 나성이라 한다. 사비 백제가 시작된 538년을 전후하여 나성은 쌓아졌을 터인데, 옛 모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 경복궁의 위치가 잘못되었다고 한 무학대사 무학대사와 함께 한양을 찾아온 태조는 궁궐터를 찾다가 지금의 왕십리에 당도하였다. 청계천이 합류하는 곳에 멈춘 뒤 서울이 될 만한 땅을 찾았다. 북악산과 남산 사이에 상당히 넓은 명당을 발견하고, 그곳이 왕도로 좋은 터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디에 궁터를 정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때 한 할멈이 나타나 이곳에서 십리를 더 간 곳이 좋다.라고 일러 준 뒤 사라졌다. 두 사람은 하늘의 계시라고 믿고 북악산 기슭에 궁궐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그 할멈이 나타난 곳을 왕십리(往十里))라 불렀다. * 경복궁의 주산과 좌향 조선왕조가 한양을 서울로 하고 궁궐을 지을 때 당대 풍수의 대가이며 불교계 왕사인 무학대사와 유학의 거목인 정도전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무학대사는 건물의 방위를 정함에 서쪽의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낙산을 바라보는 형상이 국운이 오래갈 것이라고 하고, 정도전은 한 나라의 장래를 어찌 미심쩍게 풍수에만 맡길 수 있겠는가? 임금이 백성을 잘 다스리려면 남쪽을 향하고 북쪽을 등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주장대로 지금 청와대 뒤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에게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세종의 건강이 그것입니다. 세종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 비중하기까지 했으니까요. 태종은 젊은 임금에게 행동을 절제하기를 권하며, 동시에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문(文)과 무(武)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직접 세종과 사냥에 나서겠다고 발표합니다. 자상하면서 지혜로운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문과 무 어느 하나를 편벽되이 폐할 수 없다. 나는 장차 주상과 더불어 무사(武事)를 강습할 것이다. -즉위년 10월 9일 ** 김기섭(세종연구가/한국형리더십교육센터 대표)
[그린경제=홍사내 기자] 하루. ▲ 세종실록 103권, 26년(1444) 2월 20일기사,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뢴 내용 한글의 최초 이름은 언문(諺文)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03권,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기사에 이 새로운 글자가 처음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두 달 뒤 최만리 등 집현전 학사들이 의견을 모아 언문을 창제하는 것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다. 중국 문헌이나 조선왕조실록에서 언(諺)이란 글자는 자주 쓰던 글자였는데, 이를 토대로 언문의 뜻을 정리하면 성인의 말이나 전(傳)해 내려오는 교훈적인 말을 그대로 적을 수 있는 문자. 말을 적으면 바로 글이 되는 문자. 말소리를 적는 글자. 입말 글자의 뜻이다. 그리고 3년 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이름을 붙였으며, 줄여서 정음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시대 500여 년 동안 대중들은 훈민정음이란 말 보다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이 글자를 즐겨 써 왔는데(그러므로 언문이란 세종대왕께서 만든 글자를 업신여기거
[그림경제=김리박 시인] 묵 꾀 꼬 리 한창 때는 온 메가 곱게곱게 울리던데 하나 가고 둘 가니 외로운 묵꾀꼬리 그래도 네 한 소리는 죽살인가 하느니 * 묵꾀꼬리 : 다 간 여름철에도 남은 꾀꼬리 * 죽살이 : 인생 ▲ 노부부의 밭갈이, 그들의 죽살이인가? *** 김리박 : 대한민국 한글학회 일본 간사이지회 회장 재 일본한국문인협회 회장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선정 한국어어문 지킴이 (황금상) 2006년 일본 히라가타시 교육위원회 조선어강좌 특별강사 일본용곡대학(龍谷大學) 한국어강좌 강사 일본관서대학(關西大學)비교지역문화강좌 강사 누리편지 ribak@hera.eonet.ne.jp 손말틀 (일본) 090-8147-7689
[그린경제 = 김보람 기자] 2013. 8.17 토요일 한국가스공사 연수차 한국을 방문 중인 중국인 관람객들이 통영옻칠미술관을 방문하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더운 날씨였지만 지친 기색없이 옻칠에 관심을 가지는 진지함을 표정에서 엿볼수 있었다. 특히, 이날은 통영옻칠미술관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중국 작가분들의 전시 설명으로 더욱더 열기를 더하였다. 아주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궁금한것도 물어보고, 작가분들의 작업 현장까지 직접 볼 수있는 흥미로운 시간이었다며 한 관람객분이 이야기하였다. 통영옻칠미술관 관장님 역시 중국에서 오신 관람객분들을 기쁜 마음으로 맞아 주셨다.
[그린경제=전주연 기자]찌는 듯한 8월의 무더위도 잊고 창작활동에 매진하는 통영옻칠미술관 레지던스 교육현장을 가다! 통영옻칠미술관에서는 6월에서 9월까지 4개월 간 레지던스 프로그램 새로운 영역의 한국옻칠회화 창작을 진행하고 있다.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한 중국 작가 2명, 뉴질랜드 작가 1명 그리고 국내작가 3명이 한국옻칠회화의 국제화, 세계화를 위하여 옻칠회화 창작과 서로 간의 교류를 활발히 하고 있다. 60여 년의 옻칠 외길을 걸어오신 김성수 관장님께서는 옻칠 교육을 통하여 레지던스 작가들의 창작활동을이끌고 있다. 레지던스 참여 작가들은 김성수 관장님의 가르침에 항상 집중하고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며 한국 옻칠회화 창작에 여념이 없다. 이른 아침 김성수 관장님과 중국작가 이몽홍 선생님의 풀빼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풀빼기는 옻칠목태캔버스에 자개를 붙인 부분을 제외한 곳에 아교풀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작가 이몽홍의 100호 작품을 작업대에 올려 눕혀놓고 따뜻한 물과 솔을 이용하여 문지른다. 더운 물 60-80℃ 정도를 솔에 묻혀 문지르면서 나전 주변에 붙은 아교를 깨끗이 씻어 낸다. 이때 더운 물을 오래 사용하면 부착한 나전이 떨어지기 쉬우므로
[그린경제= 김기섭 기자] 세종이 왕위에 오른 지 두 달이 못 되었을 때입니다. 신하들은 경연 자리에서 젊은 임금에게 충고합니다. 경연은 신하들이 유교 경전과 역사를 왕에게 가르치는 자리입니다. 소위 제왕학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죠. 이 날도 신하들은 왕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하면서, 공부를 하여 왕이 마음을 바르게 하면 신하들이, 그 다음에는 백성들의 마음이 바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종은 여기에 한마디 더 보탭니다. 공부도 공부 나름이라며, 마음공부(心上功夫)야말로 참 공부라고 말이죠. 그러나 경서를 글귀로만 풀이하는 것은 학문에 도움이 안 된다. 반드시 마음의 공부가 있어야만 유익할 것이다. -즉위년 10월 9일 ** 김기섭(세종연구가/한국형리더십교육센터 대표)
[그린경제=권효숙 기자] 교하 노씨(交河盧氏)의 시조는 노오(盧塢)이다. 당나라에서 한림학사를 역임하고 신라로 건너온 노수(盧穗)의 둘째 아들로서 교하백(交河伯)에 봉해졌다. 《교하노씨세보》에 따르면 오(塢)의 후손 강필(康弼)이 신라 말에 기계라는 곳에서 살면서 학문이 뛰어나 문명을 떨쳤고, 관향을 장산(章山)으로 옮겼다가 태조를 도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우고 통합삼한개국공신으로 태자태사에 오르고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해져서 교하(交河)로 복관(復貫)하였다고 한다. ▲교하노씨 파주문중에서 노사신의시제를 지내고 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을 교하로 삼고, 강필을 일세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명문의 기초를 다졌다. 노씨는 선대의 묘가 주로 개성에 있어 고려 때까지는 개성에 머물다가 조선에 들어와 파주로 옮긴 듯하다. ▲ 교하노씨 공숙공파의시제지내는 모습 가문을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로 2세손 안맹(安孟)이 동서면병마사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영순(永醇)은 요즘으로 치면 국무총리 쯤 되는 문하시중(門下侍中)과 평장사(平章事)를 지낸뒤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올라 『고려사』 열전에 등장하는 등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태종 18년,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전격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습니다. 어렵고 힘든 결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새로이 세자가 된 충녕대군에게 쏟는 아버지 태종의 마음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태종은 세자를 책봉한다는 책문에서 아들에게 신신당부합니다. 그 말은 지극히 소박합니다만 많은 함의가 담겨 있습니다. 어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신중하고 부지런히 하라는 그것입니다. 너 충녕대군 도(祹,세종의 이름)는 늘 책임이 어렵고도 크다는 점을 생각하여, 깊은 못에 다다른 듯이,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해야 한다. ** 김기섭(세종연구가/한국형리더십교육센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