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김보람 기자]충렬여고 동아리 안다미로 학생 16명과통영 RCE 선생님들이 통영옻칠미술관을 관람하였다. 안다미로는 담은 것이 그릇에 넘치도록 많이라는 순우리말로 통영의 여러 문화활동에 참여하는 충렬여고 동아리이다. 안다미로 동아리 학생들은 옻칠작품을 감상하고 전시 해설도 들으며 옻칠을 이해하고 궁금한 점들을 질문도 하며 영롱한 자개 빛깔, 천연 옻칠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체험하였다. 그리고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중국 작가들의 작업모습도 직접 보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린경제=조기태 기자] 세종마을이란 인왕산과 경복궁, 청와대 사이에 있는 청운동, 신교동, 궁정동, 효자동, 창성동,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 통인동, 통의동, 체부동, 필운동, 적선동일부, 사직동 일부 등 14개 법정동을 일컫는 별칭인데, 위대하신 세종대왕 탄생지라는 위풍당당한 역사적 공간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에서 겨레의 큰 스승 세종대왕께서 태어나시고 자라서 훗날 위대한 업적을 남기셨는데 그 역사적 의미를 오늘에 살려 세종탄신 614주년이 되는 2011년 5월 15일 종로구와 함께 이곳 주민들이 이 지역의 역사 문화적 가치를 높이고자 이곳을세종마을이라 이름하고 그 선포식을 성대하게 가진데서 비롯되었다. ▲ 지난 5월15일 세종탄신일 행사에서 종로구청장(김영종)이 세종이 되어 태어나신 곳에서 기념촬영 옆에는 정세균 국회의원 태조 5년(1396년)한성부 (서울)의 정식 행정 구역을 청계천을 기준으로 5부(동.서.중.남.북) 52방으로 편제할 때 이 지역은 북부로 구분하고 준수방, 순화방, 의통방 등으로 세분 하였으며 우대 또는 웃대, 상촌(上村)이라고도 불렀고 여기사는 사람들을우댓사람 또는 상촌인 이라 했다. 태조 6년 (1397년)
[그린경제=이윤옥문화전문기자]가실 때, 정로환 한 병을 가방에 넣어드렸다 /멀리서 손주딸 살림을 들여다보러 온 처할머니가 /선 채로 똥을 지렸다 /다리를 타고 내린 덩어리 하나가 /바닥에 멈추어 섰다/ 아내는 얼른 달려가 휴지로 그걸 훔쳐내었다/ 바지를 벗기고 노구를 씻겼다 /(중략) /가실 때,정로환 다섯 알을 내가 먼저 꺼내 먹고 /가방에 넣어드렸다. 위는윤성학의 정로환( 창작과비평,2004. 여름호)이란 글이다. 어떤 사람은 정로환을 시로 쓰고, 어떤 사람은 야밤에 라면 먹고 탈 난 속을 정로환 을 먹고 다스렸다 하고. 그야말로 인터넷에는 정로환 예찬이 줄줄이 사탕이다. ▲ 정복할 정자를 써서 지금도 정로환을 만들고 있는 일본의 일부 회사 일본말로는 세이로간(正露丸)인 정로환)은 복통, 설사, 소화불량, 식중독, 물갈이 배탈 따위에 잘 듣는다고 하는 약이다. 한국에서 파는 정로환은 예전엔 환약이라 해서 까만 콩장같이 생긴 것밖에 없었는데 요즈음은 분홍빛 당의정을 입힌 것이 등장해서 먹기가 수월하다. 옛것을 고집하는 사람들 탓인지 지금도 예전 모양의 환약과 당의정 두 가지가 판매되고 있는데 옛날식 환약은 한약 특유의 냄새가 나서 좀 꺼려지지만 오히려
[그린경제=김호심 기자] 80년대 초,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학생들에게는 마땅한 놀 공간이 없었다. 친구들과 만나는 약속장소는 동네 빵집(큰 가마솥에 찐빵, 만두, 풀빵 등을 삶아 팔던 집)이 대부분이었고 좀 여유가 있는 아이들은 제과점 등에서 만나곤 했다. 그나마 생활지도를 나온 선생님에게 걸리는 날은 양아치나 날라리 취급을 받으며, 재수없으면 다음날 교무실로 불려가 먼지가 나도록 흠씬 두들겨 맞곤 했다. ▲ 추억의 롤라장 학생들에게 숨 쉴 공간조차 정해놓고 정해진 방식대로만 삶을 강요하던 시절.... 사람마다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고 돌아가고 싶은 고향으로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은 진절머리가 나는 도려내고 싶은 기억이기도 하다. 1980년에 고등학교에 진학한 사람이라면, 더구나 시골에서 도시로 유학한 사람이라면 대부분은 정치적인 격변과 도시문화의 충격으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시기를 살아야 했다. 너그러운 성격만큼이나 웃음 맑고 붓글씨를 잘 쓰던 어느 선배는 5월의 봄을 뒤로 하고 다시는 올 수 없는 길로 피 흘리며 사라져갔고, 정답던 선생님들 몇은 또 교단에서 쫓겨났다. 또한 거의 씨족의 구성원으로 형성된 촌에서 자라면서 마주칠 때마다 하루에도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다카쿠신사가 들어선 뒷산 이름은 고려산(高麗山)이다. 명치 정부가 아무리 신사이름을 바꾸어도 산 이름은 바꾸지 못했나보다. 이 고려산은 현재 고려산 현민의 숲(高麗山県民の森)으로 지정되어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산이며 그 역사는 깊다. ▲ 고려산에서만 자란다는 꽃들, 아마도 한반도에서 건너온 한국 토종꽃이 아닐는지.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가시꽈리, 산골무꽃, 큰 갈고리풀, 엉겅퀴모양의 다무라꽃 이 산은 가나가와현에서 관리하며 천연기념물 등 많은 자생식물이 자라고 있다. 고려산의 역사에 대해서는 나카지마(中島浩)의 46쪽에 달하는 고려산 생태보고서에 보고서 자세히 나와 있다. 나카지마 같은 사람이 이럴 때는 한 없이 고맙다. 우리보다도 더 자세한 수많은 문헌을 뒤적여 고려산과 고려신사의 유래와 생태학적인 연구까지 해놓았으니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오이소쵸(大磯町) 동사무소는 누리집에 한글판을 따로 둘 정도로 고려산의 생태환경에 대해 관심이 많다. 여기에는 고려산에서 밖에 볼 수 없다는 진귀한 꽃을 많이 소개하고 있다. 이곳에는 다무라꽃이라고 부르는 엉겅퀴모양의 꽃이 있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눈길을 끈다. 쇼난평
[그린경제=조기태기자] 통인동 154-10 에 천재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1910-1937)이 살던 집이 있는데 문화유산 국민신탁에서 이 집을 매입하여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버지가 이발소를 운영하던 사직동에서 태어난 이상이 큰 아버지 김연필의 양자로 들어가던 세살 때부터(1912년) 1933년 까지 초,중,고교를 여기서 다니고, 총독부의 건축과 기사로 근무 할때까지 스물 두해를 살았던 곳이다. 본명은 김해경이다. ▲ 천재시인 이상의 집은 지금 기념관으로 쓰고 있다 이 곳에서 1930년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발표하고,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자화상」을 출품해 입선 했으며, 1932년 시 '건축무한육면각체' 를 발표했다. 이때 처음으로 필명 '이상'을 사용했다. 1933년 종로에 제비다방을 개업하고 1934년에 이르러 구인회 소속으로 활동했다. 제비다방은 1935년 폐업했다. 1936년에 결혼하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10월에 도쿄로 떠났다. 1937년 사상 불온 혐의로 일제 경찰에 검거 감금 되었다가 건강악화로 풀려나지만 회복되지 못하고 1937년 4월 17일, 28세의 젊은 나이에 도쿄대 부속병원에서 천재 시인은 요절했다.
[그린경제 = 이윤옥문화전문기자]내 어릴 적 겨울은 도꾸리셔츠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그땐 도꾸리세타(스웨터)라고 많이 했지요. 지금처럼 교복 위에 멋진 코트를 입을 수 없던 시절 내복 위에 까실까실한 털로 짠 도꾸리세타를 입고 그 위에 교복을 입는 게 전부였지요. 따뜻하기는 했지만 겨울 칼바람을 막기는 역부족이었고 무엇보다 까칠한 실로 뜬 탓에 목이 언제나 가려웠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네이버- 도꾸리셔츠 보다는 도꾸리세타 또는 그냥 줄여서 도꾸리로 썼던 기억이 난다. 까칠까칠한 싸구려 털실의 도꾸리세타를 입은 경험이 있으니 글쓴이도 이제 구시대 인물인가 보다. 목도리도 흔치 않던 시절 도꾸리세타는 최고 방한제품이었다. 춥고 가난했던 시절은 바람조차 차고 매서웠다. 지금 겨울바람은 바람도 아니다. 춥다 해도 제대로 된 털목도리 하나 없던 시절에 견주랴. 목도리를 멋으로 쓰는 지금 아이들 옷장에는 색색 깔의 목도리가 몇 장씩 걸려 있고 이 목도리들은 주인님들이 한번쯤 골라 목에 걸어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격세지감도 이런 격세지감이 없다. 그때 도꾸리라 부르던 옷을 요즘엔 뭐라고 부를까 싶어 인터넷 옷 파는 곳을 뒤져보니 목티 또는 목폴라가 압권이다. 목
[그린경제=성제훈 기자] 거칠게 내리던 비가 어제 오후부터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고 하네요. 더는 큰 피해 없이 물러가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며칠 전에 애들과 같이 수원에 있는 서호를 돌다가 '탐조대'를 보고 애들이 저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새가 놀라지 않도록 숨어서 새를 보는 곳이라고 일러 줬더니, 어른들은 왜 그리 어려운 말을 쓰냐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소강상태에 접어들다'는 말도 저희 집 애들은 알아듣지 못할 것 같습니다. 소강(小康)은 병이 조금 나아진 기색이 있음 또는 소란이나 분란, 혼란 따위가 그치고 조금 잠잠함이라는 뜻입니다. 굳이 이렇게 어려운 한자말을 가져다 쓸 게 아니라, '세차게 내리던 비가 잠시 주춤했다'고 하면 어떨까요? '소강'은 모를 수 있어도 '주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한자가 글자에 뜻을 담고 있어 글자 수를 줄이는 데는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나 글자 수 줄이는 것보다 우리 얼을 제대로 살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좀 다른 이야기인데요. 얼마 전에 예쁜 엽서를 보고 애 엄마가 밑그림이 참 예쁘다.라고 말하니, 옆에 있던 딸내미가 맞아요. 엄마, 바탕이 참 곱네요.라고 말을
[그린경제=김동규 음악칼럼니스트] 나에게는 이태리 뇌성마비 친구 마누엘 가족과의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혼자서는 먹거나 몸을 돌아 누울 수도 없고 말도 할 수 없는 마누엘을 위해 우리 부부는 매년 연말이 되면 기꺼이 노래를 불렀다. 일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릴레이로돌보아주었던 자원봉자사자들과이웃들이 모인 자리에 가서 부른 우리 부부의 노래는 마누엘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인 동시에 봉사자들을 위한 격려와 자축의 이벤트이기도 하였다. 30대 초반까지 영유아가 먹는 이유식만으로 힘겹게 살다가 고인이 된 마누엘의 장례식에서 친지와 이웃들은 이렇게 회고했었다. 마누엘은 우리들에게 진정한 희생과 봉사 그리고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해 준 오히려 고마운 존재였다고 ... 우리는 결국 남을 힐링해 주면서 자신도 힐링을 받게 된다는 것을 함께 체험한 것이다. 그리고 부부가 자선공연을 하면서 도움을 주러 갔다가 어려운 사람들끼리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운 감동을 받고 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면서 차츰 이분법으로 강자와 약자, 정상과 비정상을 가리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약한 것 같지만 강한 사람들, 강한 사람들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