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권효숙기자] 묏 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산에 있는 버들가지를 골라 꺾어 임에게 보내오니, 주무시는 방의 창문가에 심어두고 보십시오. 행여 밤비에 새 잎이라도 나거든 마치 나를 본 것처럼 여기소서.) ▲ 고죽 최경창의 무덤 연시(戀詩)를 읽으면 누구나 마음이 달달해진다. 요즘엔 문자메세지나 전화통화로 연인들이 마음을 전하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밤에 조용히 음악을 틀어놓고 편지를 쓰며 연인을 생각하곤 했다. 위의 시는 홍랑이라는 관기가 부임해온 최경창이라는 젊은 관리를 사모하다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자 배웅 나왔다가 작별하고 돌아가는 길에 지어 최경창에게 보낸 시이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임에게 바치는 순정은 묏버들처럼 항상 님의 곁에 있겠다고 다짐하며 연정가를 보낸 것이다. 최경창은... 조선 중기, 시를 멋지게 잘 쓰는 젊은 관리가 있었다.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1539,중종34 ~ 1583, 선조16)은 평안 병마절도사 수인(守仁)의 아들로 전라도 영암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가운(嘉運)이고 호는 고죽(孤竹)이다. ▲
[그린경제= 조기태 기자] 쌍홍문은 조선 선조때 임천 조씨인 조원의 아들 희정과 희철 두 형제가 임진왜란 때 어머니를 구하려다가 목숨을 희생한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나라에서 내린 두 개의 정려를 말한다. 조희정과 희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와어린 조카들을 데리고 강화도에 피신 하였는데 왜적이 들이닥쳐 그의 어머니를 능멸 하려하자 이를 맨손으로 제지하던 큰아들 희정이 왜적의 칼에 맞아 숨졌다. 곧 이어 작은아들 희철이 달려들어 왜적의 창과 칼을 꺾어 싸워 이긴 후 어머니를 산속으로 피신 시켜 초근목피로 봉양 하였으나 왜적과 결투하다 생긴 상처가 악화되고 굶주려서 숨을 거뒀다. 주변 사람들은 이 두 형제의 효행을 칭송하고 조정에 효자문을 세워 줄 것을 요청하니 조정에서는 조원의 본가 (지금의 효자동 100번지) 앞에 쌍홍문을 세웠고 이것이 효자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 조기태 : 세종마을가꾸기회 대표
[그린경제 =조기태 기자] 김가진(金嘉鎭1846-1922) 은 김상용의 12세 손으로 지금의 신교동 세종마을 푸르메 센터 근처에서 태어 났다. 호는 동농(東農)이다. 김가진의 집터 백운장 영역은 지금의 청운동 1번지 부터 10번지까지 10.000여평에 이르는 매우 넓은 터였다. 자하문터널 남쪽 입구 바로 위에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와 청운동 벽산빌리지 등이 있는 곳이다. 규장각참서관(奎章閣參書官)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1880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1881년 장례원주부(掌禮院主簿)가 되었다. 그 뒤 인천항 통상사무아문주사(通商事務衙門主事)부수찬(副修撰)주차일본공사관참찬관(駐箚日本公使館參贊官)과 장령(掌令)사복시정(司僕寺正)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 동농 김가진 선생의 글씨이며 이 바위 밑 자락에 선생의 집터가 있었다. 마흔한살이 되던 1886년 정시문과에 급제한후 개화 관료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천진 주재 종사관과 일본국 주재 판리대신 등으로 외교 일선에서 외국문물을 보고 배웠으며 1894년 갑오개혁때는 군국기무처의 의원으로서 각종 개혁안을 기초했다. 독립문의 한글과 한자 현판을 썼다. 공조판서,농상공부 대신, 중추원의장
[그린경제=지명순 교수] 옛날 복중에 민간인은 개장국을 먹고 관리층은 육개장을 먹었다고 한다. 육개장 만드는 방법은 이러하다. 쇠고기 양지머리 부분을 오래도록 푹 삶아 찢어서 매운 양념을 하여 다시 국물에 넣고 끓인다. 여기에 파를 큼직하게 갈라 넉넉히 넣고, 고춧가루를 기름에 개어 넣어 맵게 끓인 국이다. 매운 국은 간이 잘 맞아야 맛있고, 파는 끓는 물에 슬쩍 데쳐 넣는다. 건지로 고사리, 토란대, 숙주 등을 넣기도 한다. 육개장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파는 한국음식에서 사시사철 빠지지 않고 쓰이는 양념이다. 서양에서는 거의 재배되지 않지만 동양에서는 중요한 채소 중의 하나로 없어서는 안 되는 식재료이다. 중국을 거쳐 고려 이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되는 파는 전국 어느 곳이나 재배된다. 봄철에 나오는 연한 실파는 겉절이용으로 쓰이고, 밑둥이 마늘 같고 여러 갈래로 난 일명 '골파'(혹은'쪽파')라고 불리는 파는 음식의 부재료나 양념으로 사용되고, 홀로 김치를 담그거나 데쳐서 강회로도 먹는다. 파는 유황 함량이 많아 산성식품에 속한다. 파의 자극성분은 유황화합물로서 마늘과 유사한 알리신(allicin)으로 체내에서 비타민 B1의 이용률을 높여주고 살
[그린경제 = 이윤옥 문화전문기자] 19세기 말엽부터 1945년까지의 한국의 근대사를 완전히 짓밟고, 국토까지 빼앗았던 일제와 일본인들의 온갖 죄악상을 낱낱이 밝혀 기록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 중의 한 영역인 역사 유적과 문화재의 약탈, 도굴, 파괴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불법반출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략 저물어가는 대한제국으로 몰려든 일본 도굴꾼들이 가장 탐냈던 것은 개성 주변의 무덤을 파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던 고려청자였다. 그 무렵 도굴꾼을 뜻하는 은어인 호리꾼이란 말이 만들어졌다. -문화재약탈사 고려청자 최대의 장물아비 이토 히로부미 길윤형기자- 5,6십대 가운데는 호리꾼이란 말을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나도 어린시설 어른들이 나누던 대화 가운데 호리꾼, 호리꾼 하던 말이 떠오른다. 그때는 어려서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이야기의 흐름상 무덤 따위를 파헤치는 도굴꾼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저물어 가는 대한제국에 건너와 헐값에 또는 반 강제적으로 고려청자 등 문화재적 가치가 뛰어난 물건들을 빼돌린 일본인들! 고려청자 같은 값나가는 물건들은 고분을 파헤쳐서 가져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고분을 파헤치는 것을 요즈음은 도굴꾼으로 부르지
[그린경제=이윤옥기자] 일본 동북지방의 사상 유례없는 대지진의 재앙이 일어난 2011년 3월 11일. 신문방송에서는 엄청난 물기둥을 몰고 온 쓰나미가 일본 동북지방을 싹 쓸어 갔다고 대서특필했다. 이웃나라 일이지만 우리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했다. 지진해일이 지나간 얼마 뒤 일본을 돕자는 성금 물결이 쓰나미처럼 한반도를 달구고 있다라는 기사도 등장했다. 겨울에나 모습을 보이는 구세군 자선냄비가 때 아닌 3월에 나타나기도 했다. 큰 지진해일을 가리켜 요사이 스스럼없이 쓰나미란 말을 쓰는데 쓰나미란 어디서 나온 말일까? 쓰나미의 정체를 알아보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이 말 쓰나미는 올라 있지 않다. 쓰란 노량진, 당진 할 때의 진(津)을 일본어로 발음한 것이며 정확한 발음은 츠(tsu)이다. 나미란 물결을 뜻하는 한자 파(波)의 뜻소리이다. 이를 합하면 진(津)쪽을 향해서 밀려오는 파도, 물결인 셈이다. 그러나 전부터 우리는 츠나미(つなみ, tsunami)를 지진해일이하 했다. 일본문헌에서 쓰나미가 보이는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는 《준부기(駿府記)》로 1611년 12월 2일 발생한 이른바 경장삼륙지진(慶長三陸地震) 때에 政宗領所海涯人屋、波濤大漲来
[그린경제 = 김보람 기자] 2013년 3월에 시작하여 16주과정으로 진행이 된 통영옻칠미술관 옻칠아카데미 옻칠조형 제II 과정이 지난 7월6일에 수료식을 가졌다.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에 수강생 분들 모두 일찍나오셔서 담소를 나누시며 아쉬움을 달랬다. 잠시후 관장님의 축하인사와 함께 수료식이 진행이 되었다. 통영옻칠미술관 김성수관장님 께서는 한분한분 수료증을 전달하시며 그동안 수고했다는 따듯한 격려의 말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였다. 촬영을 마치고 모두 자리에 앉아서 그동안 작업을 하면서 힘들었던점, 아쉬웠던점, 재미있었던 일들을 서로 이야기하고, 관장님께 질문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특히 이날 수강생 한분은 타지에서 결혼과 동시에 통영에오게되어 그동안 이방인이라는 느낌으로 살았지만,옻칠아카데미를 우연한 기회에 알게되어 엄마,그리고 한사람의 와이프가 아닌 오로지 자신만의 가치를 찾을수있게 되어 너무 행복하다는 말씀과 함께 이제 정말 통영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셨을때 아카데미의 수강생 모들에게도 그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참으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통영옻칠미술관 옻칠조형 제II과정 수강생 여러분들 그동안 정말수고 하셨습니
[그린경제=권효숙 기자] 파주 광탄면 영장리에는 왕의 친어머니이자 후궁이라는 신분으로 사후에 묘를 원으로 조성하게 된 소령원이 있다. 숙빈 최씨(1670년(현종 11)~1718년(숙종 44)는 조선 제19대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친어머니로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태어나 7살에 궁에 들어가 궁녀로서의 인생을 시작하여 숙종의 승은을 입어 아들 영조를 낳음으로 하여 일약 무수리에서 내명부 최고의 빈에 오른 인물이다. ▲ 숙빈 최씨의 소령원 능침 숙빈 최씨는 숙종의 승은을 입은 이후 숙원, 숙의, 귀인을 거쳐 숙빈에 봉해지고, 1694년(숙종 20) 24세에 영조를 낳았다. 1718년 3월 49세로 돌아가니 당시 양주군 백석면 영장리 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장사지내고 묘호(墓號)를 소령묘(昭寧墓)라 했으며 서울 궁정동 칠궁 안에 사당을 짓고 그 묘호를 육상묘(毓祥廟)라 하였다. ▲ 소령원 원비 ▲ 소령원 비각 그 후 1753년(영조 29) 6월에는 영조가 친어머니 숙빈최씨를 화경(和敬)이라 시호를 다시 올리고 육상묘를 육상궁으로 소령묘를 소령원으로 승격시켰다. 조선시대에 임금의 생모인 후궁의 묘가 원이라는 형식으로 조성되는 것은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조선시대에서 나라에 재앙이 생기거나 국정을 펴는데 필요할 경우, 임금은 현실정치에 대한 잘못과 민폐에 대해 의견을 가감 없이 청취하곤 했습니다. 구언(求言)이란 제도가 그것입니다. 이 말 속에는 정사에 필요한 바르고 아름다운 말을 구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실 이때만 해도 나라의 재변(災變)은 하늘로부터 견책을 당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임금은 스스로 통치행위의 문제점을 되돌아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상향식 여론수렴제도인 구언을 활용한 것입니다. 재이가 발생하면 우선 임금은 국정 전반에 대해 마음을 가다듬어 반성한다는 차원에서 관료를 비롯하여 지방의 유림들, 심지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하고 싶은 말을 다하도록 이른바 구언전지를 내립니다. 그러면 응지상소(應旨上疏)라고 하여, 신하와 백성들은 상소를 통해 자신의 뜻과 생각을 개진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응지상소 만큼은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임금에게 직접 전달된다는 점입니다. 검열과정이 생략된 밀서(密書)인 셈입니다. 임금은 일일이 상소를 읽어보고 내용이 적절하다 싶으면 정책에 반영하는 것을 관례로 삼았습니다. 구언제도는 삼국시대에서부터 그 흔적이 보입니다
[그린경제=성제훈 기자] 저는 아침에 5시쯤 일어납니다. 눈뜨자마자 몸을 좀 뒤척이며 정신을 차리고, 바로 머리맡에 있는 책을 들고 책을 읽습니다. 가끔은 침대에 앉아 벽에 기댄 채 읽기도 하고,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아 침대에 기댄 채 기도 합니다. 그렇게 30분 정도 책을 읽은 뒤 씻으러 들어갑니다. 그러나 화요일과 금요일은 다릅니다. 5:15에 문화방송에서 하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강의를 듣거든요.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멋진 강의를 듣고 마음눈을 깨치는 것 또한 삶에서 가치 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김창욱 교수가 나와서 늦게 깨달은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괜히 혼자 눈물 훔치며 잘 들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강의는 책 못지않게 큰 감동을 줍니다. 우리말에 '마음눈'이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마음속에 있는 눈으로 사물의 참모습을 똑똑히 식별하는 마음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준말은 '맘눈'이며 한자말로는 심안(心眼)입니다. 살면서 사물을 살펴 분별하는 깜냥을 갖춰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그러려면 많은 책을 보고, 좋은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많이 듣는 게 좋다고 봅니다. 주말에 좋은 사람 많이 만나시고, 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