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옹(華山翁) 바위의 전설 [그린경제=제산 기자] 남원에서 서쪽으로 50여리 떨어진 순창군 적성면 고원리에 책여산(冊如山)이라는 명산이 있다. 산 중턱에 화산옹이라는 이름의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보는 위치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옆에서 보면 흡사 가을 메뚜기가 벼 이삭에 앉아 입질하는 것 같고 뒤에서 보면 몸집이 우람한 장군이 투구를 쓴 것 같다. 앞모습은 도포 입은 백발노인옹이요. 머리는 영락없이 미륵불이다. 그래 그런지 별명도 가지가지다. 메뚜기바위. 장군바위. 미륵불. 화산옹. 아마도 이렇게 많은 별명을 여러 개 가진 명물도 없을 것이다. 아득한 옛 날부터 화산옹은 신기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풍년이 들려면 아름다운 백색을 띄웠고 흉년이 들려면 흑색을, 큰 불이 나거나 돌림병이 퍼질 때에는 청색을 띄었다. 그리고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에는 적색으로 변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행인이 채계산(책여산)을 지나갈 때, 화산옹에게 경의를 표하고 가면 무사하거니와 만일 그렇지 않으면 다리를 삐거나 하는 사고를 당하기 일 수였다. 말이나 수례 탄 이도 이와 같았다. 그리하여 화산옹은 외경과 민간신앙의 기복 대상이 되었으니, 흉년이 들
[그린경제=권효숙 기자] 2004년 12월 대법원은 분묘기지권에 대한 청주한씨문열공파종중의 상고를 기각하면서 이 분묘의 피장자는 청주한씨 한상질이 아닌 안동 권씨 권준이며 안동 권씨 창화공파 종손 권혁홍에게 분묘기지권이 있다고 최종판결하여, 300여 년 간 청주 한씨 문열공파에서 관리 수호해오던 무덤의 주인을 하루아침에 바꾸어버린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 1993년 당시 묘역. 앞이 권준의 묘이고 뒤가 외증손 한상질의 묘이다 1991년 1월 민통선 지역인 파주시 진동면 서곡리 산 112번지의 한상질 묘 및 그 부인의 묘가 도굴을 당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한상질(韓尙質)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공양왕 때 형조판서를 거쳐 우부대언, 우상시,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하고, 1392년 7월 조선왕조가 건국된 뒤 예문관학사로서 진문사(秦聞使)를 자청하여 명나라에 가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결정 받아 돌아온 인물이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며 문열공파의 중시조가 되었다. 당시 도굴된 흔적을 발견한 청주 한씨 문열공파 종중은 묘의 지하 내벽부분에 그림으로 보이는 채색(彩色)들이 보이자 국립중앙박물관에 제보를 하게 되었고, 곧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
[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직장 상사가 이번 주 주말에 선상 낚시 가자고 해서 갈려고 합니다. 동료와 함께 5명이서 말이죠. 집에서 잠이나 자는 게 좋은데 젠장할 먹고 살기 힘드네요.그래서 릴과 함께 낚싯대도 인터넷으로 골라 봤는데요. 첨이라 그냥 만원 이만 원짜리 사려구 했는데 셋트로 된 게 잇더라구요. 그냥 앗사리 그냥 돈 좀 더주고 좋은 거 사서 두고 두고 쓸 요량입니다. -네이버- 의의로 일상에서 앗사리라는 말이 많이 쓰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앗사리는 일본말이라서 인지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없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같은 일본말인 무데뽀는 일본말이라고 밝히고는 일의 앞뒤를 잘 헤아려 깊이 생각하는 신중함이 없음을 속되게 이르는 말. 막무가내, 무모로 순화하라고 되어있다. 이처럼 일본말이면서 어떤 것은 소개하고 어떤 것은 빼느니 차라리 어원을 밝히고 순화어를 제시하는 게 좋을 듯하다. 왜냐하면 뜻도 모르고 일본말을 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일본국어대사전 大辞泉에는 앗사리를 풀이하길, 人の性質や事物の状態などがしつこくないさま。複雑でないさま。さっぱり。「―(と)した味つけ」「―(と)している人」로 설
[그린경제 = 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전남의 한 '미니부락'이 행정착오로 빼앗긴 땅을 1년 만에 되찾았다. 68가구, 200여 주민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전남 나주시 남평읍 신촌부락 주민들이 1915년부터 소유해온 '95년 묵은 땅'의 소유권을 잃은 것은 지난해 2월. 나주시는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신촌리(里)' 명의로 확정된 뒤 1944년 분할된 마을 땅 473㎡(143평)에 대해 지난해 2월 나주시 소유로 소유권 이전등기를 마쳤다. -광주 뉴시스 2010,3,28- 작은 마을이라 하면 될 것을 미니부락이라고 쓰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부락민을 모아놓고 한바탕 선동 연설을 하였다(채만식의 소년은 자란다) 처럼 부락은 문학작품 속에서도 널리 쓰고 있다. ▲ 오사카 인권박물관에서 펴낸 책 부락이란 말의 정의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시골에서 여러 민가가 모여 이룬 마을 .또는 그 마을을 이룬 곳. 마을로 순화 하라고 적고 있다. 지금은 이 말이 많이 사라졌지만 경기도 남양주 종합촬영소 앞 길가에 세운 아양부락처럼 아직도 마을 들머리 (입구)안내판에는 부락이란 말을 여전히 쓰고 있다. 부락민(部落民)이란 말로도 많이 쓰는 이 말은 결론부터 말하자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황희와 함께 영광스러운 세종시대를 일군 허조(許稠)는 요즘으로 치면 쓴소리 잘하는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 말 공양왕 때 과거에 급제한 이래 조선의 태조에서 세종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그이지만, 일관되고 한결같은 모습은 깐깐하고 비판적인 원칙주의자의 면모입니다. 그는 해야 할 말이 있으면 거침없이 직언하는 올곧은 신하의 표본입니다. 그의 강직하고 정직한 성품은 가족의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허조의 처제가 일찍이 자식도 없이 홀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허조의 맏아들인 허후를 후계를 삼으면서 노비와 땅, 그리고 집과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제안을 해옵니다. 허조는 내 자식이 비록 재주가 없지만 집을 계승할 만하다.고 말한 뒤 만약 재산을 많이 얻으면 반드시 호사스럽고 사치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라며 제의를 거절합니다. 부자로 살기를 바라는 여느 부모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올곧은 신하의 표본, 나의 충신은 오직 허조 뿐이다 ▲ 허조의 영정 허조의 이같은 곧은 성품은 태종 때에 이르러서도 변함이 없었던 모양입입니다. 전에 서연에서 허조를 스승[文學]으로 모셨던 세자는 태종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황희와 함께 영광스러운 세종시대를 일군 허조(許稠)는 요즘으로 치면 쓴소리 잘하는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 말 공양왕 때 과거에 급제한 이래 조선의 태조에서 세종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그이지만, 일관되고 한결같은 모습은 깐깐하고 비판적인 원칙주의자의 면모입니다. 그는 해야 할 말이 있으면 거침없이 직언하는 올곧은 신하의 표본입니다. 그의 강직하고 정직한 성품은 가족의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허조의 처제가 일찍이 자식도 없이 홀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허조의 맏아들인 허후를 후계를 삼으면서 노비와 땅, 그리고 집과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제안을 해옵니다. 허조는 내 자식이 비록 재주가 없지만 집을 계승할 만하다.고 말한 뒤 만약 재산을 많이 얻으면 반드시 호사스럽고 사치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라며 제의를 거절합니다. 부자로 살기를 바라는 여느 부모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올곧은 신하의 표본, 나의 충신은 오직 허조 뿐이다 허조의 이같은 곧은 성품은 태종 때에 이르러서도 변함이 없었던 모양입입니다. 전에 서연에서 허조를 스승[文學]으로 모셨던 세자는 태종 8년 또다시 그를 스승[右輔
[그린경제=전주연 기자] 6월 1일 통영옻칠미술관의 토요문화학교에서는 전통의 세계화를 주제로 동방대학원 대학교 옻칠조형학과 권순섭 교수님 초청 특강이 있었다. 통영의 전통과 자랑 그리고 옻칠예술의 발달, 나전칠기의 현대화 세계화에 대한 강의가 이루어졌다. 특히 우리의 전통 옻칠예술을 이해하여 전통을 기반으로 현대화하고 창의적이며 독창적인 예술로 계승발전 시켜야한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다 통영옻칠미술관에서만 들을 수 있는 강의를 통해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다양한 질문을 하고 다음에도 권교수님이 강의를 듣고 싶어하였다.
[그린경제=김동규 음악칼럼니스트] 98년 이태리. 나와 아내의 연애시절에 우리가 주로 다녔던 로마-띠볼리 주변 국도는 항상 잘 뚫려있었다. 우리가 다니던 길에는 교통 체증이 거의 없어 좋았다. 어느 날 보기 드문 쌍무지개가 떠오르는 것을 함께 보며 우리 두 사람의 희망도 함께 하늘로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앞으로 함께 가는 길이 탄탄대로일 것 같다는 설렘에 우리는 너무도 행복했었다. 그러나 달콤한 순간도 잠시. 뒤에서 빵빵거리는 소리가 나고 우리는 옆으로 차를 멈추고 한참을 피해야만 했다. 사실은 창피하게도 우리는 거의 매일 교통 정체의 주범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타던 자동차는 18년이나 된 피아트(600cc) 자동차였는데 공랭식이었고 속도를 조금만 올려도 경운기 소리가 나고 덜덜거려서 항상 평균 50~60킬로로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앞에서 달리던 성능 좋은 차들이 빠르게 사라져버리니 우리는 길이 항상 뻥 뚫려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사실 우리는 꼴찌였지만 항상 선두에서 뒷 차들을 이끌고 다녔다. 재미있다. 제일 느린 차가 선두라니.... 더 아슬아슬했던 사건은 어느 날 성악레슨을 가는데 차가 너무 막혀서 갓길주행로 부득이 하게 되었다. 평소에
[그린경제 = 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우리나라 정기 시장인 5일장의 전신은 조선시대의 향시(鄕市)에서 비롯된다. 영조46년(1770)에 나온 《동국문헌비고》에 보면 당시 각 도읍별로 장의 이름과 장이 서는 날을기록했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전국에 1,064곳에서 장이 선다고 했으며 고양시의 장은 38일에 서는 사포장, 16일로 열리는 사애장, 49일로 서는 신원리장이 있었다. 사포장은 지금의 대화초등학교 부근이고, 사애장은 행주외동의 행주나루변, 신원리장은 벽제역 인근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고양지역의 장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변모하는데 일제가 만든 《한국수산지 ,1908》에 보면 백석장(510)과 일산장(38)만이 고양지역의 시장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던 것이 1908년 경의선 개통으로 신원장은 사라지고 사포장이 일산역 인근으로 옮겨지면서 지금의 일산장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일산장이 생긴 것은 1908년 서울과 의주를 잇는 경의선 개통과 관련이 깊다. 서울역을 출발하여 40분이면 신촌, 화전, 능곡, 백마를 거쳐 일산역에 다다르므로 서울의 물건들이 일산장으로 몰려들었다. 지금 일산장은 일산종합시장으로 상설시장화 되어 있지만 여전
[그린경제 = 이윤옥 문화전문기자]《우리말 살려 쓰기》에서 이오덕 선생은 강수량 예년의 10%... 농작물 관리 비상 (ㄷ 신문 99.1.6)의 예를 들면서 강수량은 비온 양으로 쓰고 농작물은 일본말이니까 우리말 곡식이라 쓰자고 했다. 또한 채소 또는 나물 같은 말을 쓰되 야채는 일본말이다. 라고 지적한바 있다. (124쪽, 323쪽) 평생을 교육자로 살면서 아이들이 자기의 삶을 올바르게 헤아릴 수 있도록 글쓰기와 바른 우리 말글 지도를 해온 이오덕 선생의 글은 언제보아도 귀감이 된다. 그런데 위글 야채가 일본말이라는 것은 조금 맞지 않는 듯 하여 야채의 오랜 기록을 찾아보았다. 먼저《표준국어대사전》 풀이를 보면 야채(野菜) :「1」들에서 자라나는 나물.「2」채소(菜蔬)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로 설명하고 있는데 풀이말 끝에 순화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부터 쓰던 말일을 알 수 있다. ▲ 1922년 11월 16일동아일보 임시 야채시장 기사 예컨대, 같은 한자말이라도 추월 (追越): 뒤에서 따라잡아서 앞의 것보다 먼저 나아감. 앞지르기로 순화.에서처럼 순화하라고 한 것은 일본한자말에서 유래한 경우를 나타낸다. (국립국어원은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