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신원(新院) 원주 되어 사립문 고쳐 닫고 유수청산을 벗 삼아 던졌노라 아이야 벽제(碧蹄)에 손이라 하거든 날 나갔다 하여라” * 신원(新院) : 현, 고양시 신원동을 말함 * 벽제(碧蹄) : 옛 고양군에 있던 벽제관역(驛) 고양시 신원동에는 윤선도·박인로와 함께 국문학사에 빛나는 3대 시인으로 꼽히는 송강 정철(1536~1593)이 10년간 머물렀던 송강마을이 있다. 이곳에서 그는 35살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를 했고 이어 38살에는 모친상으로 다시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또한 나이 50살에는 정치 일선에서 떠나 4년간 이곳에서 자연을 벗하며 지냈다. 그리고 강화 유배지에서 죽은 뒤에는 송강마을 뒷산에 부모님과 나란히 묻혔다. (사후 71년째에 충북 진천으로 이장) ▲ 송강마을 안쪽 송강문학관 앞에 세워진 안내문 “어버이 살아 실 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엇지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위는 송강 정철의 훈민가(訓民歌)의 하나로 송강이 고양땅에 머물렀을 때 지은 시이다. 양친을 모두 이곳 고양땅에 묻은 송강은 시묘살이만도 6년을 했는데 그는 평소 술을 즐겨 마셨다. “재
[그린경제=육철희 기자〕혼례는 공경하고 신중하며 바르게 한 뒤에 친하게 되니 이것이 예의 대체이고 남녀의 구분이 이루어지는 까닭은 부부의 의를 세우는 것이다. 남녀가 유별한 뒤에 부부의 의가 있고 부부의 의가 있고 난 뒤에 부자의 친함이 있고 부자의 친함이 있은 후에 군신의 도가 바르게 된다. 그러므로 혼례는 예의 근본이다. 위는 예기에 모든 예절의 시작은 부부가 되는 혼례에서부터 비롯됨을 강조한 말이다. 통과의례인 관・혼・상・제 가운데 특히 혼례는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 하여 특별하게 여겨져 왔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던 남녀가 만나 또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일이고 두 집안이 하나로 합하는 일이니 당연히 중요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혼인의 의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채 무조건 화려하고 예쁘게만 예식을 치르려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서 먼저 요즘 사람들이 혼인(婚姻)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고 대부분 결혼(結婚)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살펴보자. 혼(婚)은 장가든다, 인(姻)은 시집간다는 뜻으로 혼인이라고 하면 남녀가 장가들고 시집간다는 뜻이 다 들어있어서 평등한 개념인데 결혼이라고 하면 남자가 장가든
[그린경제 = 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이 XX 빠져 가지고 여자 친구에게 매주 면회오라고 전화나 하고 지X이 야',' 너 만약 군종병으로 가면 네 동기들은 매일 보일러실 집합이야' 등 사회에서 보면 어떻게 저런 걸로 사람을 괴롭히느냐고 할 사소한 일로 고참들은 후임병을 괴롭히는 일이 비일비재한 곳이 군대입니다. -다음- ▲ 고참의 저 뻔뻔스러운 모습 (제주 선녀와 나뭇꾼 제공) 고참'이란 예문을 인터넷에서 찾으니 단연 군대시절 이야기가 으뜸이다. 여자들에게 있어 가장 지겨운 이야기는 남자들의 군대이야기라고 하지만 이렇게 '고참'한테 깨지고 수모를 겪으며 군생활을 한 것에 대한 것은 잘 모른다.《표준국어대사전》에는, 고참(古參) : 오래전부터 한 직위나 직장 따위에 머물러 있는 사람. 선임(先任), 선임자, 선참(先站), 선참자로 순화 하라고 되어 있다. 내친 김에 선참을 보면 「1」남보다 먼저 시작하거나 자리를 잡음.「2」다른 사람이나 다른 일보다 먼저 하는 차례. 또는 그런 사람.「3」먼저 길을 떠남.으로 나와 있다. 국어사전 설명이 논리적인 것인지는 몰라도 일반인들이 느끼는 고참이란 말은 못된 인간이란 이미지가 강하다. 왜 우리 토박이말에는 고참에
십년 만에 완성한 詩欲凍(시욕동) 유치숙(柳痴叔)의 놀라운 예지력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에게는 모자란 삼촌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를 유치숙 이라고 불렀다. 유씨네 집의 바보 아저씨란 뜻이다. 유치숙은 어느 날 느닷없이 서애를 찾아와 바둑을 한판 청했다. 서애는 당시 바둑계의 국수(國手)였다. 어이가 없었지만 상대가 숙부인지라 마지못해 응해 주었다. 치숙은 바둑알을 하나씩 딱딱 놓을 때 마다 무슨 뜻인지 모를 소리를 뇌까려댔다. 딱! 설타음순시욕동! 딱! 매표가선곡생향! 조카 뭘 그렇게 꾸물대시나? 설타음순시욕동! 허허 주무시나? 매표가선곡생향!첫판에서 겨우 한 점 차로 서애가 졌다. 한 판 더 두기로 했다. 나를 모르면 죽어. 이놈아! 설타음순 시욕동! 죽긴 왜죽어? 여기 매표가선곡생향 나간다! 매표가선곡생향! 치숙의 날궂이 같은 소리는 점입가경이었다. 서애가 또 졌다. 져도 크게 졌다. 조카 이번엔 마지막 한판이네. 설타음순시욕동, 매표가선곡생향!말끝마다 그놈의 소리. 귀가 마다하고 문을 닫을 지경이었다. 설타음순이라 시욕동, 매표가선에 곡생햐~~ㅇ! 막판을 두는 동안에는 숫제 그 날궂이 에다가 육자배기 가락까지 붙여 무당 푸닥거리 하듯 흥
[그린경제=서수향 기자] 새로운 영역의 옻칠회화는 수 천 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나전칠기의 자개와 옻칠을 주재료로 하여 제작된다. 옻칠 재료의 물리적 특성인 방수(防水), 방부(防腐), 방충(防蟲) 작용과 옻칠의 미학적 특성인 광채, 장식성, 조각미를 살려 새로운 영역의 한국옻칠회화가 탄생되었다. 한국옻칠회화는 별도의 틀(Frame)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틀(frame)을 겸하여 디자인된 옻칠목태木胎캔버스(특허청 디자인 등록)는 나무판재 위에 옻칠로 베바르기와 옻칠하기를 반복하여 면을 고르게 마감하는 전통나전칠기 제작기법으로 만들어지므로 서구식 틀에 작품을 끼울 필요가 없다. 또한 한국옻칠회화는 유리를 끼울 필요가 없다. 옻칠은 천연광채와 장식성이 뛰어나며 방습, 방부, 단열, 항균작용 등 무공해 천연재료이므로 작품을 보호하기 위한 유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사실, 영어사전에는 옻칠이 (East Asian) Lacquer 또는 japan으로 표기되어있다. 나전칠기는 lacquerware inlaid with mother-of-pearl라고 표기되어 있는 데, 이는 옻칠을 합성칠 라커로 인식하게 하고 옻칠의 품위도 떨어뜨린다. 그래서 한국옻칠회화를 Ko
[그린경제=소병호 문화전문기자]때는 1398년(태조 7년)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남원골 사매방(巳梅坊) 서당에 점잖은 한 노인이 찾아왔다. 서당에는 어린 학동들부터 청년에 이르기까지 십 오 륙 명의 학생들이 글을 읽고 있었다. 그 중 유난히 총명해 보이는 학동이 하나 있었다. 단정한 용모와 낭랑한 목소리만으로도 노인의 시선을 끌기에 족한 소년이었다. 노인이 훈장에게 묻는다. 저 아이가 누구요? 소연(蘇沿)이라고 합니다. 매우 영민해 보이는 군요. 예, 벌써 경서(經書)를 배우고 있습니다. 연(沿) 소년은 전라병사 소 후(蘇 後)의 아들이다. 네 살때 서당에 입학했고, 예닐곱살적부터 글을 지었다. 훈장은 글 읽기에 몰두하고 있는 소년을 부른다. 얘. 연아! 너 이리 와서 송강 대감께 인사 올려라! 소년이 노인 앞에 다가와 공손히 절을 올린다.노인은 송강(松岡) 이서(李舒), 홍주(洪州) 李씨다. 조선개국 3등공신으로 안평군에 봉해졌고 태종조에서 태자참찬문화부사로 재직 중인데 후일 영의정까지 오르게 될 인물이다. 휴가 차 향리에 내려 왔다가 평소 잘 알고지내는 이 서당에 들린 것이다. 네가 소연이냐? 예. 그렇사옵니다. 몇 살인고? 예. 아홉 살 입니다. 흐
[그린경제=김슬옹 문화전문기자] 1443년에 세종이 창제하고 1446년에 반포한 최초의 한글 28자는 언제 어디서 처음 이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을까? 한글이 단지 우리의 문자라서가 아니라 한글 창제는 인류 문자의 대혁명이었기에 더욱 궁금하다. 유감스럽게도 세종이 최초로 드러낸 28자의 실체는 제대로 규명되어 있지 않다. 왜 그럴까? 세종은 1443년 음력 12월에 28자를 창제하였다. 물론 이 때는 문자 창제에 성공하였지만 그것을 세상에 정식 공표한 단계는 아니었으므로 일부 미진한 점이 있을 수 있다. 세종이 돌아가신 뒤 편찬하여 발간한 세종실록은 전대미문의 이 놀라운 사건을 한자 단 58 자로 기록하고 있다. [사진 1] ▲ [사진 1]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처음으로 알린 1443년 12월 30일자 실록 기록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世宗莊憲大王實錄卷第一百二終"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비늘처럼 쌓인 보랏빛 돌들 / 서로 껴안고 / 즈믄 세월을 보냈다 / 쓸어내리려는 억센 물줄기 속 / 서로 보듬으며 / 닳아 문드러질지언정 흩어지지 않았다 / 용마 타고 다리 놓던 임 장군 떠난 지금 / 즈믄 해 흐르는 물살 위로 / 빠알간 고추잠자리 한 마리 맴맴맴 이 시는 글쓴이가 지난해 충북 진천에 있는 농다리(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8호)를 가보고 지은 진천 농다리이다. 다리는 흐르는 물위에 놓는다. 이쪽 뭍과 저쪽 뭍을 이어주는 다리에는 그래서 전설이 많고 예부터 이야기 거리가 풍부하다. 진천 농다리 뿐만 아니라 이리 오래된 다리는 전남 함평에도 고려시대 것으로 전해지는 고막천다리(보물 1372)가 있다. 고양시에도 이들 다리에 버금가는 다리가 있다. 바로 강매동석교(향토문화재 제 33호)이다. 찾는 이가 거의 없는 한적한 창릉천 변에 고즈넉하게 놓인 이 다리는 한강에 놓인 어마어마한 규모의 다리에 견준다면 보잘것없지만 소달구지가 유일한 교통수단이던 시절 더없이 소중한 마을의 공용재산이었다. ▲ 강매돌다리(석교)의 전체 모습 강매동석교는 안타깝게도 자세한 유래가 적힌 비석이 625 한국전쟁 때 사라져 고막천다리처럼
[그린경제 = 이윤옥 문화전문기자] 한국의 나폴리라 말하는 통영에는 독특한 음주 문화가 있습니다. 언제부터 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속칭 '다찌집'이라 하는 재미난 술집이 있습니다. '다찌'라는 말은 왜색 문화가 강한 이곳인지라 친구를 뜻하는 일본어 (도모다찌-友達)에서 온 듯합니다. 이곳 다찌집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즐겨 찾는 곳으로 해질녘 퇴근시간부터 영업을 하는데 손님이 많은 집은 앉을 자리가 없어서 발걸음을 돌리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다음- 어느 누리꾼이 자신의 동네 통영에만 있는 다찌집에 대한 자랑 겸 소개해놓은 글을 읽었다. 다찌를 일본말 친구를 뜻하는 도모다찌(友達、ともだち,tomodachi)의 다찌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통영에 살면서도 다찌의 유래를 잘 모르고 있다니 안타깝다. ▲ 일본 나라현 오오미야 역 앞의 다찌집 간판 다찌집이란 다찌+집으로 이뤄진 말로 다찌는 다찌노미를 줄인 말이다. 일본국어대사전《大辞泉》에 보면 たち‐のみ【立飲み】 立ったままで飲むこと。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이를 번역하면, 다찌노미 : 선 채로 마시는 일이다. 간이역의 우동집도 아니고 선
[그린경제=김호심 기자] 기억하고 있습니까? 청춘 시절에 들은 그 그리운 멜로디! 이번엔 1960년경 미국에서 탄생한 새로운 사교댄스 및 댄스리듬으로 대단히 빠른 기세로 세계적인 유행춤이 되었던 '트위스트' 입니다. 1950년대 맘보스타일의 붐 이래, 대중음악계는 새로운 리듬의 개척을 모색하고 있었지만, 최대의 성공을 거둔 리듬은 1960년에 등장한 트위스트 붐일 것입니다. 양 다리를 약 30센치 정도의 간격으로 열어, 무릎을 가볍게 굽혀 히프를 금방 다른 곳으로 비틀어 움직이면서 있는 대로 록큰롤 리듬에 맞추고 허리를 흔드는 단순 명쾌한 댄스입니다. ▲ 음반에 등장한 트위스트의 매력, 60년대는 트위스트가 세상을 장악했다. 특히 1960년 리듬앤블루스 가수 처비 첵커(Chubby Checker)가 '더 트위스트'란 노래를 이런 몸짓으로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널리 퍼졌습니다. 참고로 이는 식당의 종업원이었던 처비 체커가 삶은 감자를 밟아 비비면서 착안한 춤이라고 합니다. 남녀가 손도 잡지 않고 서로 떨어진 채 자유롭게 손발을 흔들고 몸(어깨허리다리)을 리듬에 맞추어 뒤트는 단순한 트위스트는 큰 유행이 되었으며, 이후 이 춤의 변형인 림보(limbo)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