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푸르고 가람맑고 하늘낮고 땅지고 어느새 봄은가고 첫여름이 찾아왔다 그러리 바쁘다한들 비맞고 가려는가 요즈음 많은 사람이 바쁘다. 왜 그렇게도 바쁜가? 조금만, 스스로 낮추면, 스스로 욕심을 참으면 천천히 먼 곳까지 나아갈 수 있고 맘도 가라앉는데, 자나깨나 돈, 돈이니 스스로 재능도 인간성도 다 깎이고 썩는 줄을 모르고 있다. 비가 오면 비옷을 입으면 그만일 것을 걸치지 않고 막 뛰니 참으로 한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제발 우리 좀 천천히 살자. 한 끼니쯤은 굶으면서 살자. 한 술쯤은 남을 위해서 베풀자.
어릴 때 참꽃 따서 어머니께 드렸더니 누님이 “누나 몫은?” 하는 말에 그만 빙긋 서러운 일흔 나이테 누님 가신 진달랫길 진달래는 김소월이 아니더라도 다 좋아하는 우리 한겨레의 얼넋 꽃이다. 잘 알고 있겠지만 진달래에는 참꽃이 있고 개꽃이 있다. 참꽃은 개꽃인 철쭉과 달리 따 먹기도 하고 술로 빚어 마시기도 한다. 진달래는 긴긴 역사 속에서 쌓아 올린 우리 한겨레의 얼이자 넋이다. 꽃은 다 좋고 어느 꽃을 사랑해도 좋으련만 여름의 무궁화와 함께 봄의 진달래를 아무 구김살 없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한국사람이라 하겠다. * 얼넋 : 정신과 영혼
날나라 암수이는 벚꽃 보면 미치고 피어도 좋다하고 잎꼴도 좋다하니 이래서 봄 보내느니 재미있는 핏줄이라 요즈음은 믿나라 겨레도 벚꽃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러나 날 나라에 머물러 사는 우리 나이 많은 한겨레의 마음은 어수선하다. 꽃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들딸 손자소녀들이 벚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물론 꽃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왜정 때 일본인이 벚꽃 구경하는 우리 한겨레를 업신여겨 “3등국민”, “노예국민”으로 보고 말할 수 없는 모욕적인 천대를 했기 때문인데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은 그런 일을 겪으셔선지 봄마다 벚꽃이 피면 몇며칠 방에 박히시어 아침부터 밤까지 줄곧 약주를 하시면서 빨리 지는 것을 바랐다. * 날나라 : 외국, 타국.여기서는 일본을 말한다. * 암수이 : 남자와 여자. 남녀 * 잎꼴 : 나무와 풀이 새 푸른 잎 돋은 모습 * 믿나라 :조국 * 몇며칠 : 며칠간
노오란 빛깔에 사나이 가슴 타고 아가씨 맑은 맘에 한 송이 개나리 이윽고 꾀꼬리 울고 온 메가 싱그럽네 * 봄은 여러 빛깔이 나타나 사람들의 새맘을 북돋운다. 노란 개나리는 어째선지 맘을 뛰게 하니 암수 젊은이는 더 재빠르게 느껴 사랑이 저도 모르게 싹튼다. 산에도 꾀꼬리가 사랑을 돋구어 고운 소리 뱉으려고 애써 되 풀이 하면서 목청을 익힌다. 되풀이 하면서 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 메 : 산
눈판 뜯어 맨 먼저 봄내음 돋구니 얼었던 가람도 스스로 몸을 풀고 먼 땅서 암수 제비는 갈 차비를 다그치네 * 우리 말과 한글을 줄곧 사랑하고 아끼고 다루는 재일동포들의 맘누리는 늘 겨울이다. 그래도 꽃봉오리가 트고 언 가람이 풀리고 찾아온 제비를 보는 이른 봄철이 갓 들면 한때이기는 하지만 믿고장의 봄을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남땅의 봄이란 그런 것이다. * 봄내음 꽃 : 매화꽃 / 가람 : 강시내 / 암수 : 수컷과 암컷, 맘누리 : 마음속 / 가람 : 강 / 믿고장 : 고향 / 남땅 : 타향
남땅서 귀빠져도 사랑스런 새끼들은 시나브로 맘 깎여 믿고장은 멀어지니 죽어서 무엇이 될꼬 한숨 쉬는 이 몸이니 * 귀빠지다 : 태어나다 * 시나브로 :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 믿고장 : 고향 * 남땅에 30해 이상 머물어 살면 아들딸을 보고 손자소녀도 본다. 뜻있고 밝은 부모는 열심히 우리 말과 한글을 배우도록 하고, 한겨레의 미풍양속을 지니도록 가르치나 일본이란 큰 숲과 바다 속에서는 제대로 배우기는 아주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국사람으로, 한겨레로 사는 것이 가장 사람다운 삶인 것은 틀림없다.
남나라 열해면 내고장 된다는데 파뿌리 머리 이고 갈쪽을 내다보면 개나리 노란 빛깔이 꿈결인 듯 돋아나네 * 오늘날에는 얼마 안 남은 재일 1세는 억울하게 끌려 온 사람들이 많아 2세나 3세와는 달리 믿나라(고국), 믿고장(고향)에 대한 사랑이 유달리 맑고 뜨겁다. 그러니 좋아하는 꽃도 2세/3세들이 좋아하는 벚꽃이 아니라 개나리인 것이다.
54. 봄 노래 - 땅 가람 풀려 흐르고 꽃봉오리 눈 비비고 메 허리 숲 속에 꾀꼬리 소리 돋네 오는 봄 가는 겨울을 벗 삼아 나그넷길 * 재일동포들에게 봄은 늘 서쪽에서, 곧 고국 고향 쪽에서 바다 넘어온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눈앞 보이는 봄은 한 봄이라도 내나라 내 믿고장(고향)이 아닌 풀린 가람(강)이고 부풀어 가는 꽃봉오리이니 그것을 볼 때마다 서럽지 않을 수 없다.
53. 봄 노래 - 하늘 봄철은 왔건만 길고 긴 꽃샘이니 어느 때 봄옷을 지니고 춤을 출까 남나라 꽃놀이 보며 눈물을 머금네 * 재일동포들은 강제 연행되어온 지 벌써 70해다. 봄은 오고 가지만 재일동포들에게는 오늘도 줄곧 꽃샘 봄이다. 참 봄은 통일이 이루어져야만 올 것이다.
죽살이 일흔에 무엇이 남았는지 낭떠러지 바라보니 눈물만 쏟아나고 가슴 속 깊깊은 곳에 외솔은 섰고니 * 죽살이 : 인생 * 외솔 : 국어학자. 최현배(1894~1970) 선생의 호 * 한밝 김리박 선생은 일본에 살면서도 늘 가슴 속에 외솔 최현배 선생을 모시고 산다. 일본살이 70여 년 동안 우리도 잊은 토박이말을 부여안고 몸부림치면서…. 믿나라(조국) 사람들이 간판을 영어로 도배하는 동안에도 선생은 명함에 적는 휴대폰이란 말 대신 "손말틀"을 고집한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