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용문사 창건은 913년 신라 신덕왕 2년으로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신라말 경순왕이 행차하여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그 시기는 모두 900년 대 초로, 용문사가 창건된지1,000년이 넘었다는 것은 일치한다. 용문사의 창건이 1,000년이 넘는다는 것도 고찰로서의 면모를 자랑할 만 한 일이지만, 양평 용문사는 그보다는절 안에 1,200년을 넘어보이는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가 있어 더욱 유명하다. 이 은행나무는 높이가 42.5m, 사람의 가슴높이에서의 나무의 둘레가 14m에 이르며,나무가지의 지름이 동서 28m,남북이 28m에 이르는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누가 심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나무의 추정나이로 볼 때 1,200년이 넘어 보임으로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심었다는 설과,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슬픈마음을 안고금강산으로 들어가다가 자신의 지팡이를 꽂고 간 것이 자랐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이 은행나무는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조선 세종때 신비한 나무로 당상관 벼슬을 받았다. 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깊어가는 가을 강원도 태백산에있는 적멸보궁 정암사를 찾았다. 깊고 깊은 산속에 있는 곳으로,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평생에 한 번 가기도 어려웠을 만큼 첩첩산중에 있는 절이다. 첩첩산중임에도 이곳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보물탑이 있어, 한국의 5대 적멸보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적멸보궁이란 2,563년 전 입멸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큰 장작불 위에서 화장한 뒤 나온 많은진신사리 중 우여곡절 끝에 그일부를 모셔와 이곳에 탑을 세운곳이라는 뜻으로, 불교에서는 돌아가신 부처님은 볼 수 없지만, 그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가 있는곳은 실제 석가모니불의 일부를 간직한 것으로 여겨 그 어느 불상과도견줄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으로 여긴다. 이런 귀중한 부처님의 진신사리이기에 불자들은 그 진신사리를 평생에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2,600년 전에 살았던 부처님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광으로 여기고 있으며, 그 부처님을 보는 것은 평생의 영광으로 무엇이든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어떤 소망도다 이를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에 대한 경외심은 이와 같은 것으로 진신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조 중기 임진왜란 때는 전국토가 유린되고 양국의 병사들이 각각 15만명씩 죽어갔고, 그 외 조선에서는 수십만명의 백성들이 죽어가는 최악의 국난시기였다. 이러한 억불과 국난속에서도 깨달음과 자비를 삶의 목표로 삼아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자 했던 스님이 있다. 바로 사명대사 유정 대사다.불교탄압 시대에왕실과 조정에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오로지 일본의무도한 침략에 당당히 맞서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승군을 이끌었던 사명당 유정스님은 전쟁의 마지막 시기에는 국왕의 특사로외교에도 당당히 나섰다. 사명당 유정스님은 전쟁이 끝난 뒤 일본과의 강화조약에 일본의 담판상대로아무도 나서지 않으려는 당시 상황에서 조선의 임금을대신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일본인들의 모질고 다양한 시험을 보살승의 행적으로 다 이겨내고 오히려일본인들의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사명당 유정스님은 강화조약이 마무리 된 뒤일본 곳곳에붙잡혀 갔던 전쟁포로들 1391명을 구해오고약탈해간 많은 문화재도 함께 가지고 돌아왔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의 정승 판서들은 임금의 강력한 요구에도 아무도 강화에 앞장서일본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치열했던 한국전쟁의 포탄 속에서 한때 사라졌다가 기사회생한철원 도피안사. 하지만 도피안사의 역사는 매우 깊다.도피안사는 신라 후기경문왕5년(865) 한국 풍수지리학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도선국사는 당시 일천여명의 신도들과 함께 절을 창건하고 삼층석탑을 세우고,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을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로 조성한 철불로모셨다. 도피안사사적기에 따르면 도선국사는 애초에는 철조비로자나불을 조성하여 철원 안양사에 모시려고 하였다. 그런데 철불을안양사로운반 도중 갑자기 철조비로자나불이 어디론가사라져버렸다. 스님은 황망한 가운데근처를 수소문하였더니 사라졌던 철조비로자나불이이곳에 앉아있었다. 부처님이 스스로 찾아온 것으로 여기고이곳에 절을 창건하여 철조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고 도피안사라고 이름지었다. 도선국사는 당시 신라땅 전국의 중요한 지역에 부처님의 힘을 빌어나라를 지키는 비보사찰로 절들을 창건하였는데, 이곳 도피안사도 그 가운데 하나로 정하였다. 도피안사가 있는 산은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의 화개산으로절은 물 위에 떠있는 듯한 모습이다. 이 때문에 절의 경내는 석탑과 철불을 모신 대적광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무더운 여름이 가고 며칠 전 가을을재촉하는 비가 내렸다.또 때를 맞추어북쪽에서 차가운 공기가 내려오자 대지는 급격히 식어 아침 저녁 기온차에 따라 물에서 증발하는 수증기가 공기속에서 작은 물방울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강가에는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요즈음 봄 가을 물안개가 장관인 양평군 두물머리는 이를 보기 위해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두물머리에는 작은 섬이 있고, 그 섬에는 말라 죽은 고목나무와 가마우치가 잘 어우러져 신비감이 있는 태고적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이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사진가들의 열정또한 또 다른 장관이었다. 안개가 영원하지 않아 그 순간이 더욱 아름답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순간속에서 영원을 꿈꾸듯 그 순간을 아름답게 노랫말로 풀어내고 있다. 두물머리의 안개낀 풍경과 딱 어울리는 우리가요의 명곡을 음미해 본다. 사랑을 위하여 -김종환 우우우~ 우우우~ 우우우~ 우우우~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물안개 피는 강가에 서서 작은 미소로 너를 부르리 하루를 살아도 행복 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다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여도 우리 둘은 변하지 않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백제 후기 미륵사가 있엇던 전북 익산시에는 백제말 옛 왕궁이 있었던 곳이 있다. 하지만 얼마전 까지만 해도, 왕궁으로 불릴만한 곳이 없어서, 왕궁리의 지명자체가 매우 의아하다고 생각되었다. 왕궁터는 없는데 그 이름이 왕궁리이고 보니, 누구나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왕궁리에는 백제시대 양식의 전통이 살아있는 오층탑이 있었다. 절도 없는 곳에 탑만이 남아있어 이 또한 의아스러운 탑이었다. 탑이란 본래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들었던 것으로, 탑이 있다는 것은 곧 절이 있었다는 것을 뜻하고, 절이 있다는 것은 부처님을 모신 큰집이 있고, 그 앞에 부처님을 모시듯 탑을 세웠던 것인데, 왕궁리오층석탑은 조선시대를 지나 일제강점기에 이르기 까지 큰 손상없이 서있었던 이오층석탑은역사의 풍파를 견디며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있었던 절의 이름도 잊어버려 그냥 마을의 이름을 따 왕궁리오층석탑으로 불려왔다. 하지만 여전히 왕궁리에 왕궁은 찾을 수 없어서, 많은 역사학자, 고고학자들은 궁금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기울어가던 왕궁리오층석탑을 1965년 해체복원하여 다시 세우고, 1998년에는 오층석탑의 주변을 깊이 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은 많은 산으로 이루어진 산악국가이다. 그렇지만 산 꼭대기에 빙하를 이고 있는 높은 산은 없으며, 마음 먹으면 언제나 오를 수 있는 사람과 친근한 산이고, 사람을 감싸주는 포근한 산들이다. 그런 산들로 가득한 한겨레의 국토는북쪽으로 가면서 더욱 거칠어지며 백두산을 경계로 북으로 대륙 중국과 맞닿아있고, 나머지는 동ㆍ서ㆍ남쪽은모두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한국은 산이 많아 땅의 7할이 산지이고 그 산과 산 사이에 흐르는 강가에는 비좁은 논과 밭이 있다. 한국의 산과 들은 광활하지 않아서중국의 발판이나, 미주의 대평원 같은광야나 대평원을 볼 수 없다. 따라서 광야에서 느끼는 광대한대지의 드넓음 대신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우리의 마음에 담겨, 한국인의 예술적 심성에도 그대로 담기게 되었다. 하지만그런 가운데에도 한국에서도대륙의 광야에서 보는하늘과 땅이 아스라히 먼 곳에서만나는 지평선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오직 한군데 있으니, 그곳은 전라북도 김제 호남평야에서 보는 지평선이다. 호남평야의 몇몇곳은 한국에서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으로옛부터 드넓은 논에서 풍부한 쌀을 생산하였다. 하지만 벼를 심을 수 있는 조건으로는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김해(金海)는 황금바다라는 의미이다. 산지가 많은 경상도 지역의 낙동강 남쪽에 강물이 쌓아놓은 삼각주인 김해에는많은 평야지역이 있어서, 가을이면 황금들판을 이루었기에 붙은 것 같기도 하고, 바닷길을 따라 해외로많은 금은 보화가 나고 들었기 때문인 듯 하기도 하다. 아무튼 한민족이 2,000년 전후북방에서 내려와 한반도 이곳 저곳에 터를 잡으면서, 이곳 김해에도 첫 나라가 들어섰는데, 그 나라는 가야였다. 그 가야지역에는 6개의 작은 가야왕국들이 세워졌는데, 그중에 가장 크고 강력한 가야를 세운 사람은 금관가야를 세운 김수로왕이다. 김해김씨의 시조이기도 한김수로왕이 알에서태어난 전설같은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간략하게 쓰여져 있는데, 그 이야기가 너무도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힘들어 학자들은 그냥 전해오는 신들의 이야기로 여겼었다. 한편, 한국의 성씨 중 가장 많은 사람이 바로 김해김씨이고 보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조상을 전설적 인물로 그려놓지는 않았을 것으로 여기면서도, 그를 역사적 인물이라기 보다는 신화로만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도첫 임금인 김수로왕의 능이 잘 보존되고 있고, 그와 부인인 수로왕비릉도 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불교전래는 언제부터일까? 현재 한국의 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불교전래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 순도스님으로 공인하고 있으며, 이를 이어 백제 침류 1년(384년} 인도의 스님 마라난타로 인정하고 있다. 한편 신라는 그보다늦은 400년 초기 눌지왕 때아도화상이 신라 선산지역에 처음 전하였다고 하나, 공인받지 못하고 527년 법흥왕 때에 이르러 이차돈의 순교이후로 공인되었다. 그러나 기원 전후로한반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외에 가야가 동남쪽의 해안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가야연맹의 최강국이었던 금관가야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과 깊은 관계가 있는 불교전래가 전해지고 있다. 인도의 공주였던 허황옥은 기원 후 45년 경자신의 오빠와 함께김해에왔다고 하는데, 그는 이미 불교의 수행자였다. 보옥선인으로도 불렸던 허황옥의 오빠 장유화상은 가야에 도착하여 불교를 전하고, 김수로왕과 허황옥 사이에 태어난 왕자 가운데 7명의 왕자를 출가시켜 성불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허황옥이 낳은 10명의 왕자 가운데 큰아들은 거둥왕이 되었고, 2,3째 아들은 허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나머지 7왕자는 불교에 귀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남쪽해안은 푸른바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섬이 많아 다도해라 이름을 얻은 남해는 동쪽으로 부산포에서 시작하여거제도, 남해도, 여수반도, 진도, 완도, 신안을 거처목포에 이르기 까지 펼쳐진 섬들이 자그만치3,000여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가득하다. 그 많은 섬들에는 특히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섬들이 여러개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섬들로는 몽골의 무적기마병에 끝까지 항쟁했던 보배섬 진도가 있고, 임진왜란 7년 동안 충무공을 비롯한 조선의 수군들이 목숨바쳐 싸웠던 남해도, 진도와 거제도가 있다. 그 가운데 오늘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최후까지 싸우다 마지막 생을 마감한남해의 관음포 전몰 유적지를 찾았다. 관음포 해전은 1598년 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 이른 새벽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왜군은 관음포의 맞은편 순천왜성을 근거로 버티다가 광양만에 300척의 함선을 정박하고, 명군과 협상한 후종전을 선언하고 조선에서 나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장군을 비롯한 조선해군은 조선 전국토를 초토화 하고, 수백만명의 백성들을 살상하고, 또 수십만명은 포로로 끌고갔으며, 수천년 일구어온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