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충청남도 서산만 간척 사업은 1980년 5월에 공사를 시작하였다. 당시만 해도 식량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갯벌을 논으로 만들면 경제성이 있다고 보았다. 현대건설이 공사를 하던 중 1984년 2월에 방조제 공사의 마지막 물막이 단계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9m에 달하는 조수 간만의 차와 초당 8.2m의 빠른 유속으로 승용차만 한 바윗덩어리도 흔적 없이 떠내려가기 때문이었다. 이때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은 기상천외한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정 회장은 23만 톤 급 폐유조선(길이 322m, 높이 27m)을 울산에서 끌고 와서 물을 가득 담아 가라앉혀 물막이 공사를 성공적으로 끝냈다. 고정 관념의 틀을 깨는 이 기발한 공법은 ‘정주영 공법’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건설계의 찬사를 받았다. 서산 간척지는 1986년 5월에 시범 영농을 개시했으며, 1995년 8월 14일 공사기간 15년 3개월이라는 대역사(大役事)를 마감했다. 정주영 회장은 1998년에 서산 간척지(현대그룹 서산농장)에서 기른 소 1,001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방북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어릴 적 아버지가 소를 팔아서 갖고 있던 돈(70원)을 훔쳐 가출하여 사업을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새만금 해창 갯벌에서 진행된 세계 잼버리 대회가 폐영식 뒤에도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입지 선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산 지원, 업자 선정, 지원 체계, 책임 소재 등등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계속 보도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총체적인 부실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새만금 사업은 필자가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추적해 온 사업이다. 이 글에서는 새만금 사업의 시작부터 현재까지를 검토해보고 새만금 갯벌의 미래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2005년 어느 날, 전북발전연구원(현 전북연구원)에 근무하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신은 고향이 전주인데 왜 그렇게 새만금 사업을 반대하느냐? 애향심을 발휘해서 새만금 사업이 완성되도록 도와 달라.” 나의 답변은 이랬다. “내가 고향을 사랑하기 때문에 새만금 사업을 반대한다.”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사업이라는 새만금 간척 사업은 1987년 12월 11일에, 대통령 선거를 불과 5일 앞두고 노태우 후보가 전라북도 도민들의 표를 의식하여 선거 공약으로 발표하면서 탄생하였다. 새만금(새萬金)이라는 이름은 김제평야의 다른 이름인 만금평야(만경평야의 ‘萬’과 김제평야의 ‘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