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이동식 인문탐험가] 벌써 2년도 더 지난 2019년 7월에 우리나라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됨으로서 한국의 서원들은 어진 이를 높이고 선비를 기른다는 유교국가 조선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역사성과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우리나라의 서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말 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것이 그 효시이지만, 학문 연구와 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이 독자성을 가지고 정착, 보급된 것은 퇴계 이황(李滉)에 의해서이다. 풍기군수를 맡고 있던 퇴계는 1549년에 백운동서원에 대해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받아냄으로서 서원이 나라에 의해 공인화되었고 그 뒤를 이어 서원들이 각지에서 건립되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의 서원문화를 일으킨 퇴계 이황(李滉, 1501 ~ 1570)의 학덕을 기리는 도산서원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원이다. 그런데 이 서원은 퇴계가 별세한 지 4년 후인 선조 7년에 그의 문인과 유림이 세운 것이고, 원래는 퇴계가 작은 집을 지어 유생을 가르치며 학덕을 쌓던 도산서당이란 건물이 있었을 뿐이었다. 여기에 서원으로서의
[우리문화신문= 유용우 한의사] 한의학의 오행에서 금(金)은 외부와 접하면서 소통, 변화, 통일, 수렴 등을 의미하여 계절 중에서는 결실을 이루어 가는 가을을 상징한다. 인간의 몸에 금(金)에 배속되는 장부는 폐와 대장이며, 인체의 조직은 피부와 점막, 세포막이다. 금기(金氣)가 왕성하고 균형을 이루면 폐와 대장이 튼튼해지고, 피부가 건강하고 윤택해진다. 반대로 피부를 단련하여 피부가 건강해지면 금기가 왕성해져 다른 금에 배속된 장부 조직도 튼튼해진다는 관점이다. 한의학과 동양의 학문에서 금기(金氣)를 매개로 하여 여러 가지 단련법이 존재한다. 기(氣)를 단련하는 가장 기본은 기마자세를 중심으로 한 행공법과 호흡을 통하여 기를 기르는 조식법, 대장을 튼튼히 하는 식이요법, 피부를 단련하는 피부 강화법 등 다양한 단련법이 있다. 1. 행공법 행공은 동양에서 무술 단련이나 수련을 위한 준비 동작이며 심신을 건강하게 해주는 기공(운동)으로 현재 태권도의 기마자세와 같은 기본자세나 요가의 자세, 단전호흡 수련에서 접할 수 있다. 바른 행공을 하기 위한 기본은 정확한 동작과 자연스런 호흡, 그리고 단전에 의식을 두는 것이다. 특히 행공에서 요구하는 정확한 동작을 취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임술(壬戌) 가을 7월 기망(旣望, 열엿새 날)에 소자(蘇子, 소동파)가 손[客]과 배를 띄워 적벽(赤壁) 아래 노닐새, 맑은 바람은 천천히 불어오는데 물결은 크게 일지는 않는다. 술잔을 들어 손에게 권하며 명월(明月)의 시를 외고 요조(窈窕 ,깊고 고요함)을 노래하네. 이윽고 달이 동쪽 산 위에 솟아올라 북두성(北斗星)과 견우성(牽牛星) 사이를 서성이네. 흰 이슬은 강에 비끼고, 물빛은 하늘에 이었는데 한 잎의 갈대 같은 배가 가는 대로 맡겨, 일만 이랑의 아득한 물결을 헤치니, 넓고도 넓게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타고 그칠 데를 알 수 없고, 가붓가붓 나부껴 인간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가 돋치어 마치 신선(神仙)으로 돼 오르는 것 같네..." 이렇게 시작하는 적벽부는 47살의 소동파가 송나라 원풍 5년(1082) 한가위 한 달 전인 음력 7월 16일(旣望) 달 밝은 밤에 삼국지 가장 큰 전투인 적벽대전의 무대였던 적벽 아래에서 뱃놀이하며 읊은 부(賦) 형식의 명문장이다. 880여 년 전 이곳에서 벌어진 적벽대전으로 수많은 장정이 목숨을 잃었고 그때의 큰 싸움의 주인공인 조조와 주유, 공명 등의 위인들은 영예와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답사 날자> 2021년 5월 11일 화요일 <답사 참가자> 이상훈 박순희 봉만호 서혜숙 신영란 오종실 이규석 최돈형 홍종배 모두 9명 <답사기 작성일> 2021년 5월 19일 수요일 이날 걸은 평창강 제6구간은 평창읍 상리 평화길 입구에서 시작하여 평창읍 응암리 응암굴 앞 펜션에 이르는 11km 거리다. 이날 우리가 걸은 답사길이 속한 지명은 상리, 중리, 하리, 유동리, 약수리, 응암리 등인데 이들은 모두 평창읍에 속한다. 이날 걸으면서 평창읍 시가지를 통과하였다. 평창군은 1읍과 7개면으로 구성된다. 평창군지에 나오는 자료 등을 조사하여 평창군에 대해서 약간 자세히 알아보았다. 먼저 년도별 평창군 인구수를 조사하여 <표1>을 작성하였다. 평창군의 인구수는 1967년 10만 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하였는데 이후 점점 줄어들어 2020년에는 4만을 겨우 넘기고 있다. 인구수 4만은 서울, 부산, 인천 같은 대도시의 1개 동의 인구수보다 적을 것이다. 도시의 팽창과 시골의 몰락은 우리나라가 장기적으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된다. 평창군의 인구가 줄어든 가장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때 북방족은 통일이 되어 있지 않은 부족 형태여서 노략질 형태로 쳐들어오곤 했다. 그러기에 평시에도 상대방 부족들의 동향을 파악해 두어야 할 첩보에 민감할 필요가 있었다. 일종의 정보전의 모습이었다. 세종의 업적은 여럿 있지만, 훈민정음[한글] 창제 이외에 여진족 토벌을 통하여 대규모 백성을 이주시킨 사민입거(徙民入居) 그리고 압록강 인근의 4군과 두만강 인근의 6진을 설치하여 국경을 확장한 일도 있다. 파저강 1차 전투 파저강(일명 동가강) 일대에 걸쳐 사는 야인(여진인)들은 원말명초(元末明初)의 혼란기를 이용해 조선의 강계ㆍ여연 등지를 자주 침입해 사람을 살상하고, 소와 말, 재물 등을 약탈하였다. 이에 파저강 야인정벌(婆猪江野人征伐)은 1, 2차로 행해졌다. 1차 정벌은 세종 15년(1433) 4월 10일에 압록강 중류지방의 여진인을 정벌하게 되었다. 정벌군의 총사령관에 평안도절제사 최윤덕(崔閏德)을 임명하고 평안도의 마보정군(馬步正軍) 1만 명과 황해도 군마 5,000필을 징발해 모두 2만 명의 군대를 4월 10일 강계부에서 7대로 나누어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 정벌에서 생포된 여진인은 모두 248명,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달포 전 아침 운동으로 둘레길을 돌다가 눈썰미 좋은 부인이 단풍나무 아래에 떨어져 있는 조그만 잎 하나를 집어 들어 보여준다. 아직 낙엽으로 떨어질 철이 아닌데 홀로 떨어진 그 잎은 팔방으로 뻗은 잎맥을 따라 빨간색이 안에서부터 번지는 모양이다. 보통은 잎이 다섯 개 정도 갈라져 있는데 이것은 8개나 되어 별종은 별종이네. 그래서 미운 오리새끼처럼 별종이라고 따돌림당해 먼저 가출한 것인가? 어찌 보면 미친 것이 아닌가? 미치지 않았으면 그렇게 혼자서 먼저 빨갛게 변할 이유가 없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미친 단풍잎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서울의 대학 구내에 있는 '미친 나무'라 불리는 벚나무가 생각이 났다. '미친 나무'는 연세대 신촌캠퍼스의 한글탑 옆에 서 있는 벚나무 한그루를 말한다 이 나무에는 한 나무에 흰꽃, 분홍꽃, 진분홍의 벚꽃이 마치 ‘미친 듯이’ 함께 피기 때문에 그런 별명을 받았고 꽃이 한꺼번에 피는 때가 되면 해마다 이 나무를 보러오는 학생과 시민들이 많다. 왜 이 나무가 이처럼 ‘미쳤을까?’ 한 언론(2008년4월18일 동아일보)은 “부분 돌연변이가 일어난 나뭇가지를 꺾
[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교회에 다니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별 종교가 있으시던 분은 아니었지만, 그 시대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아무런 종교가 없으면 다들 <유교>라고 대답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10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종가인 우리 집안은, 뭐 대단한 인물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요즘 말하는 근자감은 무진장 가지고 계신 어른들이 다수 계셨다. 그런 집안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내가 기독교를 종교로 가지는 것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묵인이 없었다면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기독교에 대해서 친화적인 생각을 가지신 이유는 아버지가 열 살 때부터 시작한 장사에 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내 아버지가 열 살이 되시던 해, 산에 가서 잔가지나 주워 와서는 집안 살림에 큰 도움이 안 된다고 여기셨던지, 내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떡이나 엿을 담아서 목에 걸고 판매를 할 수 있는 엿판을 만들어 주셨단다. 그 엿판을 목에 걸고 열 살 먹은 아이가 <신령역>에서 <경주역>까지 가는 기차에서 엿과 떡 등을 팔기 시작하셨단다. 때로는 상품성이 좀 떨어지는 사과를 아주 싸게 떼다가 팔기도 하셨는데, 그 장사는 무게만
[우리문화신문=유용우 한의사]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은 우리 인간들이 생활하는데 가장 적절한 온도와 습도를 가지고 먹을 것마저 풍성하므로 가장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계절이다. 여름의 더위를 씻어내며 활기찬 자연을 맞이하는 것이 가을인데 최근에는 가을다운 가을을 맞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은 보통 환절기엔 계절이 변하면서 온도차가 심하여서 외부와 소통하는 피부와 점막에 부담을 주며 특히 호흡기계에 많은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이중 초가을 환절기(8월말~9월초)는 몸은 낮의 더위를 이겨내기 위해 체열 생산을 최소화하고, 원활한 체온 유지하기 위해 체열 방출에 신체 활동을 맞추어 놓은 시점이다. 이러한 시점에 새벽녘 찬 공기가 다가오게 되면 몸의 준비된 체온 조절 능력으로는 차가운 공기를 대처하지 못하여 피부와 호흡기 점막은 온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피부와 점막이 기초체온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 대사활동이 떨어지고, 면역력이 저하된다. 호흡기와 피부에 약점을 가진 분들에게는 감기와 비염, 피부질환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는 험난한 계절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한방에서 말하는 수승화강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몸의 정상적인 기혈순환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우리는 중간에 31번 도로를 건너지 않고 계속 남진하였다. 이 부근 평창강은 강폭이 매우 넓고 하중도(河中島, 강 한 가운데 있는 섬)가 보였다. 식생으로는 갈대와 버들이 많이 보였다. 조금 가다 보니 길이 좁아져서 차는 다닐 수가 없다. 조금 더 가니 이제는 사람도 가기 어려울 정도로 길이 좁아진다. 나는 며칠 전 사전답사 차 이곳에 다녀간 적이 있다. 지도상에는 길 표시가 없지만 갈 수는 있다.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은 계속 이어진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면 여만교 다리에 도달한다. 여만리는 이 구간 평창강의 동쪽 들을 말한다. 고려 때부터 양곡이 많이 나던 곡창지대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곡식이 만 명이 먹고도 남는다고 하여 ‘여만리(餘萬里)’라고 했다. 평창강가에 있어서 들이 넓고 길어서 ‘여마니’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여만교를 지나 둑방길로 들어섰다. 우리는 강의 왼쪽 둑을 따라 걸어갔다. 강 건너편이 노산(魯山)이다. 노산의 높이는 해발 419m이지만 여만리 자체가 높은 지대라서 노산은 높아 보이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노산은 평창의 진산(鎭山, 관아의 뒷산)으로서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되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중학교 2학년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칠판에 한문 시구를 하나 적어놓으셨다, 男兒立志出鄕關(남아입지출향관)하여 學若無成死不還 (학약부성사불환)이로다 그리고 풀이를 해주시길 “남자가 뜻을 세워 고향문을 나서는 마당에, 배움에 성취가 없으면 죽어도 아니 돌아오겠습니다”란 뜻이란다. 그러고는 이 구절을 여러분들이 잘 기억하고 있으면서 어디 가든 열심히 배우고 노력해서 성공해야 한다, 성공 못 하면 고향에 무슨 낯짝을 들고 돌아오겠느냐, 그러니 열심히 하라고 말해주셨다. 그때가 1967년이었고, 당시 우리는 교육당국의 망설임 덕에 어려운 한자를 배우지 않고도 학교를 잘 다닐 수 있었는데, 나이 지긋하신 국어선생님은 굳이 한자로 된 시구를 적어놓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셔서 이 구절은 억지로 문장을 외우고 뜻을 새겼다. 조금 더 커서 글귀를 조금 알아듣기 시작하면서부터 시 형태로 된 이 말을 누가 했는지가 궁금했다. 그런데 원작자가 영 나타나지를 않아 사실상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최근 우연히 근대 일본의 정치가가 한 말이라는 주장이 있기에 관심을 두고 검색을 해보았다. 그랬더니 이 시가 일본의 도쿠카와 막부 말기에 겟쇼(月性)란 일본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