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작가] 조영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 역시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하는 무언의 항의였다. 어명을 그런 식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일이야. 선전관 조영은 그래도 상전인지라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강두명이 돌연 화제를 돌렸다. 김충선은 대단한 희귀종이요. 조국을 배신한 작자이니 당연 희귀종이지. 그가 일본을 거역하고 조선에 투항한 연유를 혹들 아시오? 오표의 질문에 대하여 사헌부 지평 강두명과 선전관 조영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김충선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다만 왕 선조가 그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이순신과 더불어 지난 수 년 간 적지 않은 무훈을 세워 자헌대부란 종 2품의 관직까지 올랐다는 정도였다. 그것은 알지 못하지만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굉장한 독종이지. 선전관 조영은 김충선에게 납치되어 혼이 나갈 정도로 곤욕을 치룬 기억을 떠올리며 새삼 몸서리를 쳤다. 그랬었군요. 선전관께서는 그와 면식이 있는 것이군요. 그 자가 날 핍박한 적이 있었지. 하지만 난 엄연히 조선의 관리로 그따위 겁박에 넘어갈 리가 있었겠나? 그 때문에 성상께서 나의 강직한 행동에 감복하시어 오늘과
[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작가] 선전관 조영이 자신의 무릎을 쳤다. 옳다. 이순신이 꼴 보기 싫어서 그 반대인 북쪽의 여진으로 간 것은 아닐까? 오표는 남몰래 콧방귀를 뀌었다. 그들의 추측은 하품이 나올 만 한 것이었으나 정작 방향은 정확히 짚은 셈이었다. 김충선은 현재 여진에 머물고 있을 것이었고, 그 곁에는 오표 자신이 평생을 걸쳐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 일패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었다. 오표는 손을 뻗어서 자신의 술잔을 쥐고 단숨에 마셔버렸다. 어허, 이 친구가 술이 많이 고팠던 모양이로구만. 조영은 다시 술병을 들어서 오표의 잔을 채워 주었다. 오표라고 했던가? 제법 무예를 알고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여기 강지평과는 막역한 관계라고? 오표는 대꾸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사헌부 지평 강두명이 해명을 하고 나섰다. 이 친구야? 신세는 내가 지고 있는 것이지. 무슨 소리야? 자네의 그 놀라운 권력의 줄에 내가 의지하고 있는 형국이지. 강지평이 아니라면 내 어디 가서 이런 행운을 누릴 수 있겠는가. 선전관 조영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암, 강지평이 얼마나 대단한지 내 새삼 깨
[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작가] 선전관 조영은 이미 당해본 경험이 있는지라 조심성 있게 선조에게 아뢰었다. 선조는 다소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과인이 그만한 안배도 해놓지 않았겠느냐? 하오면......? 강지평에게 방책을 묻도록 하라. 선전관 조영은 머리를 조아렸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그러나 여진은 먼 길 이옵고 조선과는 왕래가 없는 적국이옵니다. 신이 목숨을 걸고 어명을 받들고자 하오니, 부디 성상께옵서는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선조의 입가에 비릿한 실소가 흘러갔다.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 신하된 몸으로 감히 어떠한 요구를 올릴 수 있겠나이까. 그저 헤아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올 뿐이옵니다. 당상관으로 임명해주마. 당상관이라 함은 정 3품의 이상 품계로 중앙 정치에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는 고위 벼슬이었다. 조영의 품계에서 적어도 세 단계 위로 승차하는 기회였다. 조영은 재빠르게 성상을 우러르며 목청껏 외쳤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 * * 조영이 마주 친 사내는 첫 눈에 봐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강두명이 소개한 장본인은 바로 오표였다. 여진을 아는가? 오표는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잠시 망설였다. 여진은 그의 뿌리였고 생명이며 조국이었다.
[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작가] 조선의 전 영토가 사지입니다. 지금도 가토의 군대가 부산을 재침하여 북진하고 있으며, 고니시의 군대는 웅천으로 상륙하였소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일본의 수송선단이 바다를 넘어오고 있는 형국이요. 한시가 급합니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소이다. 서애 유성룡의 간곡하고 비장한 어조가 도원수 권율의 심기를 자극하였다. 이제 물러설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도원수 권율이 입술을 악물었다. * * * 여진이다. 선조의 얄팍한 입술을 비집고 나온 단어는 선전관 조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전란이 재개 되었는데 갑자기 여진을 다녀오라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은 대목이었다. 의금부에서 풀려난 후 사흘 만에 강두명의 안내를 받아 은밀히 선조를 알현한 자리였다. 여진에 누구를 만나란 어명이시옵니까? 선조는 순간적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 다시금 머릿속을 정리했다. 김충선이란 작자가 이순신에게서 떨어져 나가 종적이 묘연하다. 이놈이 대관절 어디에 무엇 때문에 종적을 감춘 것일까? 상감마마, 소인에게 어서 명을 내려 주소서. 선전관 조영은 재촉했다. 여진은 사실 위험한 변방이었다. 그곳을 반드시 가야 한다면 생명에 대한 보상과 보장을 받아야
[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작가] 도원수의 예측에 공감하는 바입니다. 아마도 전멸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이순신 함대의 궤멸은 조선의 패망과도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지요. 남해를 사수하지 못한다면 육지에서의 수비 또한 불가능해 집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이순신장군은 그 때문에 어명을 따르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의 함대가 고스란히 원균장군에게 남겨진 것입니다. 대감! 그래서 저에게 어떤 어명을 거역하라는 말씀이옵니까? 왕명으로 삼도수군통제사 지위에 올라있는 원균을 인정하지 말고 이순신장군을 복귀 시켜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유성룡의 입에서 또 다시 위험천만한 발언이 튀어 나왔다. 맙소사. 영의정 유성룡이 이건 제 정신이 아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발칙한 망언을 토해낼 수 있단 말인가. 선조가 임명한 원균을 배제하고 백의종군 이순신을 복직 시키란 말이 아닌가. 이것이 도통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럼 내게...... 어명을 거역하라는 말입니다. 대감? 놀랍소? 놀라는 것에서 그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은 이 사람이 명령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도원수의 자리는 삼도수군통제사를 마음대로 박탈하고 임명할 수 있는 권력이 없습니다.
[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작가] 유성룡의 목소리가 갈라져 피가 토해질 것만 같았다. 권율은 조선의 권력가인 영의정 유성룡이 평소와는 어딘가 모르게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성룡의 열변에 대하여 권율은 부인하지 않았지만 조선의 장군으로 답변했다. 왕실을 수호하는 것이 나라를 보존하는 것이고, 그 길이 백성을 위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백성과 왕권, 나라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을 듯싶습니다. 서애 유성룡은 서늘한 미소를 머금으며 권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노장군 권율의 기개가 아직도 눈가 주변에 푸르게 자리하고 있었다. 도원수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소. 이제 다시 일본의 대대적인 공세가 예상되는 시점입니다. 특히 수군이 문제외다. 아시고 있지만 현재 삼도수군을 통제하는 장수는 원균수사요. 그가 이 나라 조선과 백성을 구명할 수 있는 장수로 여기고 계시오? 유성룡의 표적이 거기에 있었던가. 원균장군이 미덥지 않으신 것입니까? 아니요. 난 그를 훌륭한 장수로 여기고 있소이다. 용맹하고 충성심이 강한 조선의 장군이지요. 하지만 이순신장군이 지키는 바다는 평화롭게 느껴지고, 원균장군의 바다는 종잡을 수가 없으니 그것이 문제 아니겠습니까. 도원수 권율도 인정
[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기자] 마침 명나라 원군이 도달해 있으니 병사들은 부족하지 않을 것이나 그들과의 연합전략이 승패를 가르지 않을까 싶소이다. 명나라는 일본과의 화의(和議)가 이루어지지 않자 대규모의 병력을 조선에 파병하고 있었다. 권율의 미간에 엇박자가 나고 있었다. 불만의 여지가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명군은 천군(天君)이라 하여 오만하고 무례하지요. 그들에게 당당한 조선의 기개를 확인시켜 주고 싶으나 우리의 힘이 극도로 미약하니 억울한 상황이 종종 벌어집니다. 내 어찌 모르겠소이까. 서애 유성룡은 노기가 끓고 있는 권율을 다독여 주고 있었다. 명나라 장수들과 군사들의 행태가 도를 지나치고 있다는 보고를 이미 받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특별한 묘안은 없었다. 다만 명나라 장수에게 명군의 패악(悖惡)에 대한 경종(警鐘)을 정중히 요구할 뿐이었다. 명나라의 전쟁이 아니라 조선의 전쟁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조선에 유람을 온 유람객으로 행세하고 있습니다. 아니 차라리 그렇다면 다행이지요. 어떤 때에는 일본군보다도 더 극심한 만행을 양민들에게 저지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권율의 하얀 수염이 형용할 수 없는 노기로 인해서 뻣뻣하게 굳어졌다. 조선
[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작가] 이 어인 행차시오? 서애 유성룡의 방문은 전혀 의외였다. 권율은 의관을 급히 살피면서 한 걸음에 달려 나갔다. 유성룡은 빙그레 말없이 웃으며 도원수 권율에게 수인사를 건넸다. 왜적의 준동이 심상치 않으니 도원수의 심기(心氣)가 얼마나 불편하시겠소. 유성룡의 형식적인 인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영의정 신분의 유성룡이 사전 예고도 없이 도원수를 찾아 온 것은 어떤 연유가 있으리라. 그것이 무엇인지 권율은 궁금했고 또 불안했다. 일전에 탈영을 감행했던 부하 병사를 즉결처분하는 과정에서 탄핵(彈劾)을 받아 지위를 박탈당한 적이 있었다. 물론 재차 기용되기는 하였지만 중앙의 정치라는 것이 탐욕(貪慾)과 간교(奸巧)함으로 무장되어 당파(黨派)의 대립 사이에 불꽃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얼음장처럼 냉각되어 파멸될 수도 있음을 체험한 터였다. 이 사람의 심사(心事)가 무엇 중요하겠소이까. 임진년의 실수를 다시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요. 임진년의 초기 대응에 실패하여 불과 이십 여일 만에 한양을 적들에게 내주었던 일을 말 함이었다. 그때는 왕 선조와 대신들이 평양과 의주로 각기 도주하기가 바빴었다. 만일 의병과 명나라, 이순신의 함
[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작가] 위대한 목숨이란 단어에 누르하치는 힘을 주었다. 김충선의 생명을 가치 있게 파악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김충선의 목숨과 일패공주와의 혼사를 명국과 비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으나 그것이 누르하치의 시각에서 발생하자 결코 우습지도 않았고, 가볍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소신의 생명을 그리 높게 평가해 주시는 것이옵니까? 당연한 일이 아니냐. 그대는 이제 짐의 사람인 것을! 황공하옵니다. 그런데 정작 너의 영혼은 조선의 이순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 어떠하냐? 너의 답변을 듣고 싶구나. 누르하치는 집요한 구석이 존재했다. 일패공주가 김충선의 궁색한 모습을 대변하고 나섰다. 아바마마, 그 사람의 청혼을 수락하셨다면 이제 그를 자유롭게 하소서. 속박을 하시는 것은 칸답지 못하신 처사이옵니다. 누르하치는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다. 그대와 이순신의 관계에 대하여 일패로부터 많은 보고를 받았다. 이제 조선의 이순신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때의 김충선은 여전히 그다웠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소신의 우상이옵니다. 누르하치의 표정이 급변했다. 우상이라고 했느냐? 이순신 장군은 소신의 양부(養父)이옵
[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작가] 대단한 물건이로구나. 단순 용맹한 무장이 아니다. 개똥같은 지략만 머릿속에 담고 있는 선비도 아 니고.......넌 대관절 누구냐? 일패공주를 아내로 삼기위해 천 리 멀리 달려 온 조일인 김충선이옵니다. 조일인, 김충선! 짐이 여진을 통합하여 만주(滿洲) 구룬(國家)이라 호칭 할 것이다. 이것은 짐이 숭상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님으로부터 점지 받은 새 국호인 것이다. 만주의 한자음이 바로 문수이다. 문수보살은 대지(大智) 보살로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는, 신성하고 지혜로운 공덕의 신이시다. 너에게 기회를 주마. 아직 통일되지 않은 여진의 남아있는 부족을 문수지혜와 공덕의 무력으로 통합하여라. 짐의 만주를 우선 완성하라! 그리하면 너의 청혼을 기꺼이 받아주마. 김충선은 머리를 조아렸다. 삼가 명을 받들겠나이다. 일패공주의 눈에서 감격의 눈물이 찔끔 흘렀다. 감사합니다. 칸이시여! 너의 안목에 찬사를 보내주마. 반드시 여진을 통일하여 위대한 만주국을 완성하겠나이다. 그리하여 명나라를 도모하는 날을 하루라도 앞당기겠나이다. 일패공주도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누르하치는 그런 일패공주를 가만히 일으켰다. 너 또한 그에게 현혹된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