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주 남산은 신라땅에 세운 불국토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신라시대에는 527년 법흥왕 때 불교가 공인받은 뒤 도읍지인 경주에서 볼 때, 남쪽에 높이 솟은 남산의 골짜기마다 수많은 불상과 탑과 절을 세웠다. 신라인들은 인도나 중국의 바위벽 속에 세워진 석굴사원들을 보고, 신라땅에도 석굴사원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인도나 중국의 돌들과는 그 강도가 너무도 달라서 암벽을 쪼아내서 굴을 파내고 그 안에 부처님을 새기는 일은 하지 못하였다. 대신 토함산의 정상 부분에 동쪽을 향하여 석굴 형식의 절을 지었으니, 이것이 바로 석굴암이다. 토함산 석굴암은 정밀한 설계에 따라, 마치 돌로 된 건물을 짓듯이 세운 건축물이며 그안에 모셔진 불상과 보살상들은 불모(불상을 조각하는 사람)들이 으뜸 정성으로 조성한 조각상이다. 한편 경주 남산 계곡에는 남쪽을 향해 있는 커다란 화강암이 있는 데 이 바위 안에 한 분의 석불좌상을 모셨다. 이 불상은 석굴암의 부처님처럼 크지도 않고 정형화된 모습은 아니지만, 토굴 속에 결가부좌로 앉은 채 혼자 수행하는, 그리고 무한의 깨침을 얻은 뒤 선정(禪定, 참선하여 마음의 내면을 닦아 삼매경에 이름)에 들어있는 모습으로 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관광명소의 제일로 손꼽히는 제주도는 섬 한가운데 한라산이 우뚝 솟아있다. 이 한라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자동차길 중간지점에 해발 1,100고지가 있는데 여기에는 제주도에서 태어나 한국인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산악인 고상돈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고상돈은 1948년 제주에서 태어나 청주로 이사하여 성장하였다. 그는 1965년 청주에서 충북산악회에 가입하여 등산을 시작하여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정상 등반을 위해 나라 밖 원정 등반 준비를 해나갔다. 이렇게 쌓아온 경험으로 한국일보 후원, 대한산악연맹의 주관으로 19명 원정대의 일원으로 출발하여, 1977년 9월 15일 한국인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해발 8,848m의 에베레스트 정상은 베이스켐프에서 출발하여 7시간 20분 동안의 죽음을 각오한 도전이었다. 당시 에베레스트산 정상은 세계의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오르고자 하는 최고의 목표였지만 높을 뿐 아니라, 산소가 희박하여 숨조차 쉴 수 없고, 거센 바람과 눈사태 등 험란한 여정과 변덕스러운 날씨로 좌절하는 경우가 허다하였으며, 도전하다가 오르지 못하고 조난당하여 죽는 사람이 많았다. 한마디로 죽음을 각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국가에는 충(忠)을, 부모에서는 효(孝)를 가장 중요한 삶의 지표로 삼고 살았던 성리학의 시대가 조선시대였다. 국가에 충성한다는 것은 정당한 절차에 따라 임금이 되고, 그가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임금으로서 해야할 바를 다 할 때, 곧 임금 자신의 권세만 누리고 잇권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백성과 나라의 안위를 보살피는데 최선을 다하고, 백성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실천의 의무를 다할 때. 신하와 백성들은 그 임금에게 충성을 해야하는 것이다. 임금의 행실에 대하여 아무런 평가도없이 나라의 안위를 보살피지도 않고 방탕생활을 하면서 백성을 괴롭히는 잘못된 일을 하여도 무조건 따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리학에서는 임금이 그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을 때는 역성 혁명도 가능하다고 맹자의 가르침에 있다. 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임금이면 곧 나라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워 임금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도 그 잘못을 지적하는 간언을 하거나 잘못된 명령에 따르지 않고 관직을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임금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서 충성을 다하고, 그 댓가로 권력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 재산을 하사받고 생전에는 물론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불교에서의 탑은 원래 부처의 유골을 모신 것이기 때문에 매우 존귀하다. 따라서 탑은 반드시 절의 중심부 곧 법당 앞에 세우며, 공양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처음으로 탑이 세워진 것은 기원전,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난 뒤 석가모니의 사리를 똑같이 여덟 개로 나누어 인도 전역에 각기 탑을 세워 안치한 것이 처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영향을 받아서 삼국 시대부터 건립하였다. 탑은 만드는 재료에 따라 목탑ㆍ석탑ㆍ전탑 등으로 나뉘며, 목탑은 나무, 석탑은 돌, 전탑은 벽돌, 모전 석탑은 돌을 벽톨 형태로 다듬어서 만든 탑이다. 지역에 따라 중국에서는 전탑이, 우리 나라에서는 석탑이, 일본에서는 목탑이 각각 발달해 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탑은 백제 후기에 세워진 익산 미륵사터 석탑이며, 남북국시대 세워진 불국사 다보탑과 불국사 3층 석탑, 고려 중기의 신륵사 다층 전탑ㆍ경천사 10층 석탑, 조선의 원각사터 10층 석탑이 대표적이다. 어제(5월 23일)부터 29일까지 사단법인 한국불교사진협회(이사장 최금란)는 경복궁 옆 법련사 불일미술관에서 불탑을 주제로 한 제28회 회원전을 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북 안동 지역에는 지금도 유서깊은 많은 불교유적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한국의 목조건축물로 가장 오래된 봉정사의 극락전이 있는데 이는 1972년 보수 당시 발견된 상량문을 추정해 본 결과, 처음 건립연대는 1200년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 있어 유명한 봉정사지만, 안동지역은 이 밖에도 수많은 불교유적이 즐비하다. 지금은 논으로 변해버린 임하면 임하동 마을의 논 가운데에는 마을 반경 500m 이내에 4기의 석탑이 여기 저기 흩어져 남아있어 매우 특이하다. 이곳은 현재 안동호 아랫쪽 임하호 서쪽에 자리하고 있고, 논 주변으로는 농가들이 흩어져 있으며 논 한 가운데 석탑들이 서있다. 석탑이 남아있다는 것은 이곳에 절 전각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한두동이 아니라 여러 동의 불전과 스님들이 살았던 요사채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본다면 임하동 일대는 대궐 건축물과 같은 대규모 가람이 빽빽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타깝게도 어느 시기에 절이 폐사되었는지 건축물은 다 사라져 버리고, 주춧돌과 기단 등 돌로 이루어진 것들만 땅속에 묻혀 남아있을 뿐이다. 더구나 부처님 사리를 모셨던 탑들은 허물어져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이 탑은 강릉시 성산면 관음리에 있는 오층석탑으로, 그 높이는 약 3.3m 정도다. 이 석탑은 2층의 기단 위에 5개층의 탑신이 놓여져 있으며, 온전하지는 못하지만 비교적 탑신과 옥개석들이 남아있다. 탑의 상륜부(탑신 위 탑의 장식부분)는 부분적으로 손상되었지만, 이정도의 온전한 모습의 석탑은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이 탑이 있는 곳은 관음리지만, 옛 기록에 따르면 근처에는 안국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니 본래는 안국사라는 절의 석탑이 아닌가 추정된다. 그렇지만 마을의 이름이 관음리 인것을 보면, 관음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 탑은 주변에 흩어지고 땅속에 묻혀있던 것을 발굴하여 복원하였으며, 복원한 뒤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1992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을 찾아가기 위하여 네비게이션에 "관음리오층석탑"을 찍고 길안내를 받으며, 이리저리 구불구불 오르는 길은 강릉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 주변으로 매우 복잡하였다. 고속도로를 피하여 구불구불 돌고 돌아 찾아가니, 산마루가 바로 보이는 곳에 한적한 기와집 앞에 이르렀다. 이집 주차장은 개인집 주차장이었지만 그집 앞에 차를 세우고 올려보니, 100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청자 기법을 중국의 도자기에서 받아들여 이를 투각과 삼감기법등으로 발전시키고, 고려인들만의 미적감각을 표현하여 천하의 명품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던 고려시대 상감청자들이다. 전시품들을 보면서 황홀함을 느꼈으며, 선조들이 이룩하였던 문화유산들이 얼마나 귀하고 자랑스러운 것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또 고려시대와 더불어 발전하였지만, 후기에는 전성기와는 다른 변형되거나 쇠퇴해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여길만한 것이 없이 고귀한 작품들을 이렇게 한데 모아 볼 수 있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고쳐청자 모듬전시회였다. 청자전시회는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본관 3층에서 현재 전시중에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명품이었던 백자전도 함께 본다면 한국의 청자와 백자에 대하여 제대로 볼 수 있는 전시일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독자님들의 관람을 추천하며 시리즈를 마친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려시대에는 불교와 유교문화가 함께 경쟁과 조화를 이르는 시대였기에 차문화와 술문화가 같이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그에 맞게 사용할 그릇들도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고려시대가 지난 뒤에는 차문화는 차츰 기울고 술문화만 남게되어 고려시대 발달하였던 다양한 청자 다기(茶器)도 사라지고 말았다. 고려시대에는 차를 마시면서도 운치를 느낄 수 있도록 향을 피웠다고 한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중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이전시대에는 청동으로 만들던 것들을 고려시대에는 청자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물건을 쓰는 입장에서 보면 깨지기 쉬운 청자는 다루기도 훨씬 조심스러웠을 것이나, 만들기도 어렵고 다루기도 어려운 물건들을 굳이 청자로 만든 까닭은 귀한 곳에 쓰는 물건을 더욱 귀하게 대접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청자의 시작은 중국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청자의 기법을 더욱 발전시킨 것은 고려였다. 고려청자는 중국에서 더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한국인의 뛰어난 손재주를 마음껏 보여주는 고려청자의 모습을 보면서, 요즈음 세계에 펼쳐지는 한국의 문화상품들이 갑자기 솟아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려왕조는 성종때(981~997) 때부터 각종 의례에 대한 제도를 정비하면서 그에 쓰이는 자기들을 만들었다. 이를 위하여 《상정고금예문》이라는 책을 펴냈다. 각종 의식을 주관하기 위하여 제기도감, 도제고 등의 관청을 설치하고 국가 의례용 그릇들을 체계적으로 만들고 관리하였다. 의례용 그릇에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철(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전설의 동물), 용, 이룡(이무기) 등의 무늬를 장식하였고, 의식을 행할 때에는 향로에 향을 피웠는데, 이 향로도 청자로 만들었다. 연꽃문양을 돋을 새김으로 장식한 향로는 백제금동대향로를 생각하게 하는데, 백제금동대향로에서는 연꽃이 수많은 산으로 표현되었고, 그 산마다 수많은 동물들과 사람들이 표현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와 관련된 국가적 의례가 많았는데 대표적 행사로는 연등회와 팔관회가 있었다. 이런 행사에는 다양한 그릇들이 사용되었을 것이고, 귀한 음식과 음료와 행사용 물품들은 귀한 청자에 올려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