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포구락이라는 궁중무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조선조 전기의 포구락은 16인의 무희가 8인, 또는 4인으로 무리를 이루어 춤을 추었는데, 음악총서인『악학궤범』에는 포구락이 그림과 함께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여기에 의하면 죽간자 2인의 구호를 시작으로 기녀(妓女) 16인이 좌우로 나뉘어 춤을 추다가 차례로 채구(彩毬)를 던져서 성공하면 상포를 받고, 실패하면 오른쪽 볼에 먹을 찍고 물러난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많은 궁중정재 중에서도 유일하게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놀이형식의 전통성을 지니고 있는 재미있는 춤이란 이야기, 조선조 후기, 순조 때의 포구락도 전기와 대동소이한데, 다만 비교가 되는 것은 무희가 16명에서 12명으로 줄었다는 점, 반주악곡명이 달라진 점, 창사의 내용이나 횟수가 다르다는 점 등을 이야기 하였다. 또한 조선조 말엽부터 현재까지는 관악 영산회상의 악곡들을 삼현육각 편성으로 반주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이 곡이 모음곡 형식의 구성이고, 다양한 장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음향이 큰 악기들이 편성이란 점, 이와 함께 느린 10박, 빠른 10박, 6박, 4박 등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영조 때 그림 《이원기로회계도》에 보이는 춤과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이 그림에는 2가지의 춤, 곧 포구락ㆍ처용무의 궁중무용과 함께 3종의 연주형태가 보이는데, 하나는 삼현육각(三絃六角) 편성, 둘은 현악기 연주자의 모습, 세 번째는 박(拍)을 들고 서 있는 집박 악사의 모습이란 점이다. 집박(執拍)이란 박을 잡고 있다는 의미로 지휘자를 뜻한다는 점, 포구락(抛毬樂)은 고려 문종 때 송에서 들여온 춤이어서 당악정재로 구분된다는 점, 향당정재의 구별은 죽간자의 유무와 한문으로 된 구호나 치어를 노래한다는 점도 이야기 하였다. 옛 기록에 의하면 포구락은 무려 150여명이 추었다고 전하는데, 당시 고려 교방에 속해있던 초영(楚英) 등이 구장기별기와 함께 임금 앞에서 연희하였으며, 무희는 12명 짝수로 좌우 6명씩 두 대(隊)로 나누어 추었다는 점, 고려시대의 포구락에 관한 기록에는 반주 음악이 절화 영(折花令),수룡음영(水龍吟令), 소포구락 영 청평악 영(淸平樂令) 등이었다는 점, 포구락은 현재까지도 자주 무대에 오르는 거의 유일한 전통무용으로 무희들이 좌우로 편을 갈라 공놀이를 하는 춤이란 점들을 이야기 등을 하였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1730년, 조선조 영조 때 그린 《이원기로회계도》라는 그림에 보이는 궁중의 춤과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이 그림은 나이 많은 원로들의 모임 장면으로, 각각 독상을 받아놓고, 춤과 음악을 감상한다는 점, 춤의 형태는 포구락(抛毬樂)과 처용무(處容舞)이며 음악연주형태는 삼현육각(三絃六角)과 집박, 가야금과 거문고와 같은 현악기 연주자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얘기했다. 또 궁중의 춤은 정재(呈才)라고 부르는데, 재예를 바친다는 넓은 의미였으나, 점차 궁중의 춤으로 정착되었으며 당악(唐樂)정재와 향악(鄕樂)정재로 구분되고 있다는 점, 전자는 고려시대 중국에서 들어온 춤을 가리키는 말이고, 후자는 이전부터 전래되고 있는 우리의 고유한 춤을 지칭하는 이름이란 점, 양자의 차이나 특징의 기준은 모호해 졌으나 죽간자(竹竿子)의 유무와 춤을 추는 중간에 무희들이 직접 한문구호(口號)나 치어(致語, 임금의 덕을 칭송하는 말)를 부르면 당악정재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도 말했다. 한반도에 당악이 유입되었다는 사실은 문헌이나 절의 탑, 석비, 종(鍾) 그림 속에서 발견되며 당악이 들어오면서 이전의 음악을 향악이라 부르는 향당(鄕唐
[우리문화신문=서한범 교수] 지난주는 장대장타령을 복원, 재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되었던 것으로는 박춘재의 음반, 원로들의 증언이나 고증, 실기인들의 시범창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지난주 이야기는 재담소리극 공연에서 허 봉사역을 맡은 백영춘의 소리나 춤, 연기력에 일반 청중들은 감탄했다는 이야기, 판소리를 기반으로 하는 창극(唱劇)은 100여년 되지만, 재담소리나 배뱅이굿 등은 극(劇)과의 협업을 이루지 못하다가 1990년대 말에 시작되어 그 세가 너무도 미미한 수준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백영춘은 장대장타령의 재현에 심혈을 쏟으면서 재담과 어우러진 연희극의 일종인 발탈을 배웠고 그 이수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서울 재담소리의 전승을 위해 《서울재담소리보존회》를 만들고 경서도 창악회내에광무대라는 소공연장을 개장한 뒤, 강습회와 공연을 지속해 왔다는 이야기, 백영춘의 소리가 물먹은 소리소리에 물기가 묻어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건강의 적신호였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백영춘 명인 하늘이 눈은 가져가도 소리는 못 가져 가 서울의 옛 재담소리, 장대장타령은 그 줄거리가 부모의 재산을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정득만으로부터 백영춘이 재담소리와 인연을 맺게 되는 이야기를 하였다. 정득만은 3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이창배와 함께 활동하기 시작하여 50년대에는 청구고전성악학원의 소리선생으로 제자들을 양성했으며, 80년대 초반 벽파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경서도 소리의 중흥을 위해 함께 애쓴 명창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숨이 길고 청이 높아 사설지름시조, 긴잡가를 잘 불렀는데, 특히 조르는 목이 일품이었다는 점을 얘기했다. 그런 그에겐 또 다른 비장의 무기가 있었는데, 바로 1920년대 재담으로 유명했던 박춘재의 사랑방에 드나들며 익혀두었던 장대장타령과 같은 재담소리도 기억하고 있었다는 점, 그래서 백영춘에게 재담소리를 권했고 백영춘은 이를 받아드렸는데, 집중적으로 배웠다고 하는 부분은 앞부분인 만포첨사 대목과 이를테야 대목이었다는 점을 말했다. 또 재담소리의 음조직이나 표현법은 서울 경기지방의 토리(음조)로 불러왔다는 점, 맥이 끊긴 소리를 다시 재현하기 위해 재담과 관련된 옛 기록이나 고음반, 재담에 관한 증언, 원로 소리꾼들의 녹음작업 등을 통해 복원을 시도했고, 이를 1999년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공개적으로 올렸다는 점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백영춘이 청구고전성악학원의 벽파 이창배선생을 찾아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남자 제자가 흔치 않던 시기여서 그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이야기, 벽파의 수업 방식은 성악의 기초를 정가(正歌)라고 생각하고 시조나 가사, 때로는 가곡도 지도하면서 발성이나 호흡을 강조한 다음, 선소리 산타령이나 좌창 등을 지도했다는 이야기, 그것도 실기와 함께 이론적 배경, 즉 민요의 역사, 종류, 사설의 이해, 고어(古語)풀이 등 이론적인 바탕을 지도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뿐난 아니라 벽파선생의 강의는 언제나 풍부한 내용으로 재미있고 교훈적이었으며 판서 자체가 너무 멋있어 수업이 끝나도 지우지 못했다는 이야기, 이러한 영향을 받은 백영춘 역시 제자들에게 폭 넓은 소리의 세계를 안내해 주고 있다는 이야기, 백영춘은 스승의 뜻을 받들어 소리공부와 장단 등 모든 과정을 마치면서 강습과 각종 공연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1975년, 국악협회가 주최한《전국민요경창대회》에서 당당하게 장원을 하였고 다음해에 이수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장대장타령을 하는 백영춘 명인 이번 주에는 그가 재담소리와 만나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백영춘에게 영향을 준 라디오 속의 명창들 중에는 장학선 외에 이반도화(李半島花), 이정렬, 이부용, 장금화 등도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평양의 기성권번 김밀화주의 제자들이란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므로 현재 남한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서도소리의 뿌리는 김밀화주의 소리이며 그 소리를 이어받은 장학선을 국가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 서도소리의 최초 예능보유자로 인정하였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이후는 김정연과 오복녀가 서도소리를 전승해 왔고, 이들의 제자들이 현재 그 소리를 이어가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백영춘에게 소리의 길을 가도록 영향을 준 장학선, 이정열, 이반도화, 이진홍, 이소향, 유개동과 같은 명창들은 1900년대 초 한일강제합병 앞뒤로 태어나서 어려운 시대를 소리와 함께 살다간 진정한 예능인들이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또 백영춘은 라디오를 들으며 소리를 익히던 중, 방송국이 주최하는 민속의 잔치에 출전하여 실력을 발휘하였고,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벽파 이창배 사범에게 부름을 받았다는 이야기, 그래서 소리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청구고전성악학원을 찾아 선생의 제자가 되었고 그 학원에서 시조며 가사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재담소리를 복원하여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은 백영춘은 어떤 인물인가? 어떤 인연으로 소리꾼이 되었을까?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따라 장터에서 무나 배추 또는 파를 단으로 묶어 파는 일을 돕기도 했는데, 파 단을 셀 때 단순하게 수량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가락이나 장단을 넣어 구수하고 음악적이어서 주변에 널리 알려졌다는 이야기,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일부러 시장에 나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여서 시장 내에서 밖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한국 장단(長短)은 3분식 구조인데, 장-단의 단조로운 구조보다는 중간에 단 장-으로 변화를 주어야 재미가 있다는 이야기, 백영춘은 작업장에 갈 때면 늘 라디오를 지니고 다니면서 당대 명창들의 소리를 놓치지 않고 따라 불렀다는 이야기를 겻들였다. 그가 좋아했던 명창 중에서 장학선(1905~1970)에 대해서는 1920년대 초, 다나베가 쓴대동강주유기(大同江舟遊記)에 나오는데, 대동강에서 4인의 기생과 뱃놀이를 할 때, 제일 소리가 뛰어나 인상적이었던 사람이 15세의 장학선(張鶴仙)이었다는 이야기, 그녀는 10세 때 평양 관우물 소리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3월 29일 저녁 정효재단 설립기념으로 백영춘, 최영숙 등이 무대에 올린 개막 공연 이야기를 하였다. 주로 서울지방에서 불리고 있는 아리랑을 비롯한 민요창과 장대장타령이라는 재담소리를 위주로 하였다는 이야기, 스승 이창배 명인의 활동이나 공적으로는 노랫말 속에 나오는 어려운 고사(古事)나, 한문구(漢文句)의 해설, 부정확한 발음이나, 왜곡된 표현, 저속한 내용은 수정하였으며 그래서 오늘날 교육현장에서 전통민요의 교재를 만들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날 개막공연은 박춘재의 재담소리와 이창배의 경서도소리가 중심이었지만, 앞으로 이어지는 4개월간의 공연에는 회심곡 탑돌이 등의 불가(佛歌), 무가(巫歌), 신민요 등, 경서도창의 과거와 현재의 모든 노래를 포함하며 공연과 함께 명창으로부터 소리도 배우고, 대화도 나누는 시간을 마련한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창배 사범과 함께 경서도창 전승에 공이 있는 정득만 명창 과천패 소완준의 제자로 산타령을 이어오는 한편, 시조와 가사, 긴잡가도 잘 불렀으며 박춘재의 사랑방에 드나들며 귀에 익힌 재담소리를 백영춘에게 일러주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현재의 경서도 명창 중에서 이창배,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소리의 맥(脈)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면서 국악인들이 공연 무대를 구하기 어렵다는 점, 대관 비용이 만만치 않아 공연이 활발치 못하다는 점, 소극장의 활용이 점차 많아지는 추세에, 때마침 서초동에 문화재단이 설립되어 그 기획공연으로 소리의 맥(脈)을 올린다는 점, 이는 1910년대 박춘대의 재담(才談)소리와 1950년대 이후 이창배(李昌培) 명인으로부터 전수받은 경서도 소리를 더 올곧게 지켜가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점을 얘기했다. 또 재담소리란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를 익살과 해학으로 상황에 맞도록 진행해 나가면서 소리와 춤, 연기로서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민속극의 한 장르라는 점과 주권을 잃고 실의에 차 있던 일제강점기 박춘재의 재담은 큰 위로가 되었다는 점도 말했다. 그러나 광복 이후에는 점차 쇠락하기 시작하였고, 60년대 이후에는 이를 계승 하려는 전승자가 없어 단절위기를 맞았다는데 다행히 백영춘이 토막소리 위에 당시의 음반자료나 녹음자료, 또는 원로들의 구술자료와 문헌자료 등을 활용하여 완전하게 재현했다는 점, 그래서 우리는 재담소리가 어떤 소리인가를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이번 공연에도 장대장타령을 비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