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어제는 티비엔 경남교통방송 ‘토박이말바라기’ 꼭지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지난 이레끝(서울) 가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는데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데 걸린 때새와 견주어 볼 때 이야기를 하는 때새가 참 짧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할 때마다 제 나름대로 혼자서 마련하는 이야기가 듣는 분들에게 와 닿는 것인지도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마치고 지음이(작가) 분께 기별을 해서 듣는 분들 생각도 보태고 만드는 분들 슬기까지 모아서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어서 토박이말바라기 어버이 동아리 모임이 있었습니다. 거기서도 마찬가지로 이제까지 이야깃거리를 제가 마련해 왔는데 앞으로는 서로 알고 싶은 것을 미리 말해서 이야깃거리를 넉넉하게 해 보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가운데 라디오에서 ‘네이밍’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듣고 놀란 이야기를 했습니다. ‘작명’이란 말을 많이 쓰느라 ‘이름짓기’라는 말을 못 썼는데 이제 ‘작명’도 ‘네이밍’에 밀려나고 있는 것이 슬펐습니다. 뒤낮(오후)에는 뜻깊은 모임이 있어서 꼭 자리를 함께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못 해서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밤에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정치란 수많은 사람과의 소통에서 출발한다. 정책을 논하는 때는 자주 간담회를 가질 터인데 세종시대에는 기본적으로 서로 모여 학습을 했다. 학습이 중요하다는 것은 논어의 첫말에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로 나타나고 있다. 모든 인간의 활동은 배움에서부터 출발한다. 조선의 정치 관리들도 이러한 학습 특히 집단 학습의 형태에서 출발했다. 경연의 운영 태조는 고려 말의 경연 제도를 이어받아 경연청을 설치했고, 정종과 태종도 이어 경연을 하여 세종 때 경연 강의가 발전하는 선례가 되었다. 세종은 즉위한 뒤 약 20년 동안 꾸준히 경연에 참석했는데, 초기에는 집현전을 두어 경연을 전담하는 학자들을 양성하고 경연관을 강화하여 경연 강의의 질을 높였다. 사상의 교환은 사람끼리 서로 만나 의견을 교환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정치에서는 예비 작용으로서 경연과 윤대가 있다. 사람들이 모여 공식적인 형식을 갖추며 사적인 학업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경연은 《조선실록》 총 원문 12,470건 중 세종 2,011건으로 세종은 경연을 부지런히 그리고 꾸준히 진행한 임금이다. 실록 전체의 6분의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어제 저녁을 먹고 마실을 나갔습니다. 다른 고장에는 눈이 온다는 기별이 있더니 바람이 좀 차갑게 느껴졌습니다. 바람이 얼마나 차가운지는 제 눈이 알려준답니다. 바람이 차가울수록 눈에서 눈물이 더 많이 나기 때문입니다. 여느 때보다 눈물이 많이 나서 날이 추운가보다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도 눈이 마뜩잖은 걸 보니 추운 날씨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눈이 좀 쉬라고 말을 건네니 셈틀 앞에 앉아 있는 때새를 줄여야겠습니다. 오늘 맛보여 드리는 토박이말 ‘오롯하다’는 ‘모자람이 없이 모두 다 갖추다’는 뜻입니다. 흔히 많이 쓰는 ‘온전하다’와 ‘완전하다’와 비슷한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집인 사전에는 낱말들이 그런 사이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앞으로 ‘완전하다’, ‘온전하다’라는 말을 써야 할 때 떠올려 써 보시기 바랍니다. 4352해 들겨울달 스무엿새 두날(2019년 11월 26일 화요일) 토박이말바라기 이창수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행주치마” 하면 우리 백의민족 부녀들의 맑고 깨끗한 모습들이 확 떠오른다. 지금은 주방에서 남녀가 모두 즐겨 입는 것이어서 모양도 색깔도 가지각색이다. 이 “행주치마”를 보통 “앞치마”라고 한단다. 우리 엄마는 특별히 “흰 앞치마”를 사랑하시는 깨끗한 분이시란다. 어린나이에 시집온 뒤 늘 가마목*의 큰집며느리로 살아오시면서 흰 저고리 검은색치마를 깨끗이 입고 흰 앞치마를 입고 가마목일을 하셨다하더구나! 이것은 일종 습관으로 되여 부엌일을 할 때면 우리가 옷을 입는 것처럼 여기시었단다. 흰 앞치마를 두르고 일하시는 엄마를 보면 어린 나는 “우리 엄마가 제일 멋진 엄마”로 보여 늘 흐믓한 기분이었단다. 뒤에 내가 커가면서 교과서에서 “행주치마” 이야기 곧 조선의 녀성들이 행주치마폭에 돌을 날라 왜놈들과 싸웠다는 미담을 배웠을 때 이렇듯 행주치마는 조선 녀성의 고귀한 품성을 길이 전해가고 있음을 느끼었단다. 엄마가 칠십고개에 올라섰을 때란다. 엄마는 흰천으로 보기 좋게 크고 작은 앞치마 두벌을 새로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엄마에게 “왜 또 앞치마예요? 아직도 주방을 못 잊어서요?” “아니, 이 좋은 세월에 내손으로 한 번 더 일해보구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지난 닷날(금요일)에는 진주교대 송희복 교수님께서 제가 있는 배곳(학교)에 오셔서 ‘우리 근대시에 나타난 토박이말’이라는 벼름소(주제)로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손수 지으신 책을 손씻이(선물)로 주시고 그 안에 있는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들려주셨습니다. 미처 알지 못했던 낱말 풀이와 뒷이야기까지 더해 더 재미가 있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것도 있었지요. 그래서 뒤풀이 자리에서 제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상화가 지은 ‘이별을 하느니’에 나오는 ‘애인아, 하늘을 보아라. 하늘이 가라졌고 땅을 보아라. 땅이 꺼졌도다.’에서 ‘가라졌고’를 다른 분은 ‘가라앉고’의 대구 방언이라고 풀이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고 있는 ‘가라지다’는 ‘가려지다’라는 뜻이니까 ‘가려졌고’로 보는 것이 맞지 않겠냐는 것이었죠. 뒤에 땅이 꺼졌다는 말이 나오니 ‘가라앉고’는 뜻이 겹친다는 말과 함께 말이지요. 그리고 김영랑이 지은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에 나오는 ‘장광에 골붉은 감잎 날러오아’에서 ‘골붉은’은 보는 사람마다 풀이를 다르게 하는데 ‘살짝 붉은’이 가장 알맞은 풀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김병화 박물관은 원래 김병화 농장이 있던 곳에 세워졌다. 1974년에 김병화가 죽은 후 농장은 차츰 쇠퇴해졌다. 잇단 생산 목표 초과 달성에 판단력이 흐려진 중앙정부가 과도한 목표를 지시하기 시작했다. 아랄해 유역 상류의 사막화가 심해짐에 따라 수확량이 줄어들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목화 생산량이 소련 평균보다 낮아졌고 모범 농장이라는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렸다. 1991년에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한 이후 농업 정책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무료로 제공되는 땅에서 농사를 지어 수확량의 일부만 집단 농장에 내면 됐지만 이제는 농사를 지으려면 돈을 내고 땅을 빌려야 했다. 자연히 농사의 수익성이 떨어졌고 이농 현상이 심화되었다. 농토를 떠난 고려인들은 도시에서도 취직이 여의치 않아 살길을 찾아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연해주로 다시 되돌아가는 고려인들도 나타났다. 김병화와 고려인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소련 내에서의 고려인 이미지는 매우 좋았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에서도 근면하고 성실한 고려인은 매우 좋게 평가받는다고 한다. 1976년에 준공한 김병화 박물관에는 김병화가 사용한 집기와 가구들, 그리고 당시의 생활상을 담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양산통도사 삼층석탑(보물 제1471호) - 이 달 균 임진 그 전쟁 통에 산과 절은 타버려도 받침돌 각 면에 새긴, 형형한 코끼리 눈 안으로 나이테를 가진 목질의 기단과 기둥 석탑 말하기를 출가인 산승들은 영축산 통도사 수행의 계단 아래 죽비에 문득 깨닫거든 중생제도에 힘쓰시오 영축산에 둘러싸인 통도사 경내엔 부처님의 영험한 기운이 넘쳐난다. 불타께서 법화경을 설법한 인도 영축산(靈鷲山)의 불국토를 이곳으로 옮겨온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햇살 따라 멋대로 굽은 솔향의 송림불토(松林佛土), 고색창연한 부도림, 흥선 대원군이 썼다는 일주문현판 '영축산통도사(靈鷲山通度寺)' 글씨 등등은 나그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배도 고프고 괜스레 걸음 빨라지지만 곧장 영산전 찾지 말고 마당에 선 오래된 탑 구경도 하고 가자. 남북국시대(통일신라 말엽)와 고려 초기 역사가 궁금하다면 잠시 이 탑 앞에서 당시를 상상해 보라. 다행스러운 것은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전체적인 규모와 양식 등을 볼 때 9세기 후기의 특징이 잘 드러난 보물이라고 하니 예사로이 지나칠 것은 아니다. 하층 받침돌 아래에
[우리문화신문=유용우 한의사] 가을을 오행 중 금(金)의 계절이라 하고 결실의 계절이라고 할 때, 우리 몸에서 가장 근접한 장부는 대장이다. 지난 칼럼에서 너(외부)와 나와의 교류를 금(金)의 과정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는데, 공기를 호흡하는 과정과 더불어 음식을 섭취하는 과정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 소화 과정은 분쇄하고 녹이고 쪼개는 소화ㆍ흡수ㆍ배출과정 등으로 나뉘며, 이러한 과정을 위한 소화액의 분비과정과 흡수과정이 따로 나뉜다. 그러므로 소화기 점막의 포괄적인 작용은 금의 과정이 맞지만 개개의 장부로 보면 소화기관의 운동과 전달은 화(火)의 과정, 소화의 분해 과정은 토(土)의 작용, 발효과정인 금(金)의 작용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소화기 장부 가운데 금에 가장 집중된 장부는 대장이다. 대장의 유익균과 해로운 균 사이의 전쟁, 이러한 균총과 나의 면역력의 대결, 이러한 와중에 흡수되는 결과물과 배출되는 노폐물이 금의 과정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장에서 흡수되는 것은 뼈가 된다. 음식을 소화 흡수할 때 한방의 기본적인 개념은, 소장까지의 소화흡수 과정에서 흡수된 성분은 몸의 에너지와 살이 되고, 이후 스스로 소화하지 못한 음식의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금성대왕 신앙이 한강 유역으로 옮겨졌다는 추론은 2006년 박흥주 연구를 통해 시작되었다. 나주 금성 해양세력에 의한 굿 문화가 조선 말까지 뱃사람들과 해상물류유통의 상인들에 의해 향유되었는데 그 중심에 금성당이 있다는 근거는 문헌 기록과 민속 전승 자료다. 자료에 따르면, 한강으로 전해진 금성신앙 정착지는 두미암 일대며 오늘날의 염창동이다. 이 지역은 조선 시대 서해안 염전으로부터 채취한 소금을 서울로 운반하기 위해 소금 배들이 드나들던 한강 어귀이다. 이곳에 두미암(斗尾岩)이라는 바위산이 있었고, 그 아래에 두미암(斗尾庵)이 있었다. 소금 보관 창고가 많았던 이곳에는 도당산이라고 불리던 야산 봉우리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도심개발이 이루어지고 수많은 아파트 건립이 이루어져 옛 흔적은 거의 없어졌고 한강 변 쪽으로 산자락 일부만 남아있는 정도다. 그렇지만 지명은 옛 정취를 담고 있어서 소금 창고에서의 소금을 뜻하는 염(鹽)과 창고 첫머리 창(倉)을 붙여 염창동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 이곳 행정구역은 서울특별시 강서구지만 그 이전에는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염창리였다.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염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아침에 배곳으로 올 때 자주 만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집에서 나오는 때가 비슷하기 때문이지요. 어제 아침에는 혼자 내려오더군요. 반갑게 인사를 하고 왜 혼자냐는 물음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한 마디 주고받기도 어려웠는데 어제는 묻지 않은 말까지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한 마을에 사는 이웃인데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해도 좋을 사인데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5배해 아이들 배움을 돕는 날이었습니다. 해야 할 거리가 적지 않은 날이었지만 요즘 많이 어수선한 아이들을 다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잔소리를 좀 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날마다 입버릇처럼 하고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차분하게 말을 해 주었죠. 네 뜸(반)에 이야기를 하고 낮밥을 먹으러 가서 보니 잔소리를 한 보람이 있는 뜸이 있는가하면 이야기를 하나마나한 뜸도 있었습니다. 나이가 같은 아이들이지만 뜸의 자리느낌(분위기)에 따라 참 많이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옆에 앉은 천둥벌거숭이 동무에게 눈치를 주는 언니 같은 아이도 있었으니까요. 또 다시 돌아온 토박이말 되익히는 날입니다. 그동안 밀려서 네다섯 낱말씩 한 적도 있는데 오늘은 이 이레(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