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남의 글을 우리글로 바꾸어 놓는 일을 요즘 흔히 ‘옮김’이라 한다. 조선 시대에는 ‘언해’ 또는 ‘번역’이라 했다. 요즘에도 ‘번역’ 또는 ‘역’이라 적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지난날 선조들이 쓰던 바를 본뜬 것이라기보다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쓰니까 생각 없이 본뜨는 것이다. 언해든 번역이든 이것들은 모두 우리 토박이말이 아닌 들온말에 지나지 않고, ‘역’이란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쓰겠지만 우리에게는 낱말도 아닌 한갓 한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우리 토박이말을 쓰느라고 ‘옮김’이라 했을 터인데, 남의 말을 빌려다 쓰기보다 우리 토박이말을 살려 쓰려는 마음이 아름답고 거룩하다. 그러나 남의 글을 우리글로 바꾸어 놓는 일을 ‘옮김’이라고 한 것은 우리의 말본으로 보아 올바르지 않다. ‘옮기다’는 무엇을 있는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자리바꿈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본디 뜻에서 비롯하여 ‘발걸음을 옮기다’, ‘직장을 옮기다’, ‘말을 옮기다’, ‘모종을 옮기다’, ‘눈길을 옮기다’ 같은 데로 뜻을 넓혀서 쓴다. 하지만 언제나 무엇을 ‘있는 그대로’ 자리바꿈한다는 본디 뜻을 바탕으로 삼은 채로 넓혀지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답사 날짜: 2024년 6월 10일(월) 답사 참가자: 김혜정 송향섭 윤석윤 윤희태 이상훈 전선숙 최동철 황병무 (8명) 답사기 쓴 날짜: 2024년 6월 16일 효석문학100리길의 제4구간은 방림농공단지~평창 용항리 경로당까지다. 평창군에서 만든 소책자에서는 이 길의 이름을 ‘옛길 따라 평창 가는 길’이라고 부르고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뱃재 옛길을 따라 산을 넘고 숲길을 지나 만나는 빼어난 평창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기암절벽을 조망할 수 있는 구간으로 흙길을 걸으면서 청정한 자연을 즐기며 맑은 산소를 마실 수 있는 길이다. 주진리와 용항리 강변길은 그림같이 아름다운 곳으로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바람과 맑고 깨끗한 평창강의 물소리까지 그야말로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다. 효석 이야기를 계속하자. 이효석은 경성에서 3년을 살다가 1934년 평양에 있는 숭실전문학교 영어 교수로 부임하였다. 오늘날로 치면 대학교수가 된 뒤 효석은 경제적으로 여유를 갖게 되었다. 평양에서 이효석은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1936년)을 비롯한 장ㆍ단편 소설은 물론 <낙엽을 태우면서&g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요즘은 전화와 문자 메시지 같은 전자말에 밀려서 글말 편지가 나날이 자리를 빼앗기고 있다. 하지만 알뜰한 사실이나 간절한 마음이나 깊은 사연을 주고받으려면 아직도 글말 편지를 쓰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글말 편지라 했으나, 종이에 쓰고 봉투에 넣어서 우체국 신세까지 져야 하는 진짜 글말 편지는 갈수록 밀려나고, 컴퓨터로 써서 누리그물(인터넷)에 올리면 곧장 받을 수 있는 번개말(이메일), 곧 번개글말 편지가 나날이 자리를 넓히고 있다. 글말 편지거나 번개말 편지거나 편지를 쓸 적에 흔히 쓰는 말이 ‘올림’ 또는 ‘드림’인 듯하다. 전자말 편지는 봉투를 따로 쓰지 않으므로 ‘올림’이든 ‘드림’이든 편지글 끝에 한 번 쓰면 되지만, 글말 편지는 편지글과 봉투에 거듭 쓰게 마련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편지글 끝에 ‘올림’이라 쓸까 ‘드림’이라 쓸까? 망설이고, 편지글에 쓴 말을 봉투에다 그대로 써야 하나 달리 써야 하나 걱정하는 듯하다. 이런 망설임과 걱정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편지에서 쓰는 ‘올림’과 ‘드림’이 무슨 뜻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하겠다. 알기 쉽게 뜻부터 말하면 ‘올림’은 ‘위로 올리다’ 하는 뜻이고, ‘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우리는 대화천 오른쪽 둑길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국도 31번 도로가 지나가는 하안미교를 다리 아래로 건너자 오른 편에 비석 2개가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하나는 하안미1리에서 세운 ‘88 서울올림픽 기념 비석이다.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하안미1리 사람들이 왜 서울에서 열린 88올림픽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는지 잘 모르겠다. 당시는 권위주의적인 노태우 정권 시절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정부에서 비석을 만들라고 시켜서 만들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다른 비석에는 ‘半程’(반정)이라고 세로로 비석 이름이 쓰여 있다.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반정에 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이 곳은 예부터 한양(서울)과 영동 지역을 이어주는 길목으로서 원주와 강릉의 중간지점 (각 200리)이라 하여 반정(半程)으로 불리고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 공문서의 전달이나 공무로 급히 가는 사람이 타고 갈 말을 매어두는 역(驛)과 이 길을 오가는 이들이 잠시 쉬어가는 주막집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 없다. 선인들의 애환이 서린 고장의 유래를 후세에 전하고 고향에 대한 애틋한 정을 길이 간직하고자 이 돌을 세운다. 1993년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언젠가 어느 교수가 내 연구실로 들어서며, “재수 없는 놈은 엎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으며 받은 아픔을 털어놓겠다는 신호다. 혼자 속으로 ‘엎어지면 제아무리 재수 있는 놈이라도 코가 깨지기 십상이지.’ 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이야기를 들어 주느라 애를 먹었다. 이분은 “재수 없는 놈은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 하는 속담에서 ‘자빠져도’를 ‘엎어져도’로 잘못 알고 쓴 것이다. 어찌 이분뿐이겠는가! 살펴 헤아리지는 않았지만, 요즘 젊은 사람의 열에 예닐곱은 ‘엎어지다’와 ‘자빠지다’를 제대로 가려 쓰지 못하는 듯하다. 제대로 가려 쓰자고 국어사전을 뒤져 보아도 뜻 가림을 올바로 해 놓은 사전이 없다. 우리말을 이처럼 돌보지도 가꾸지도 않은 채로 뒤죽박죽 쓰면서 살아가니까 세끼 밥을 배불리 먹어도 세상은 갈수록 어수선하기만 한 것이 아닐까? ‘엎어지다’는 서 있다가 앞으로 넘어지는 것이고, ‘자빠지다’는 서 있다가 뒤로 넘어지는 것이다. 코가 얼굴 가운데 튀어나와 있으므로 엎어지면 자칫 땅에 부딪혀서 깨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빠지면 뒤통수가 땅에 부딪혀 깨질지언정 얼굴은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앞부분에 ‘대화장’이 나온다. 봉평 장에서 허생원은 물건이 안 팔려서 재미를 못 보았다. 그래서 일찍 거두고 밤새 걸어서 대화장으로 가면 어떻겠느냐고 허생원이 조선달에게 제안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만 거둘까?” “잘 생각했네. 봉평 장에서 한 번이나 흐뭇하게 사본 일 있었을까. 내일 대화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오늘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 걸.” “달이 뜨렷다.” 윗글을 읽어보면 아마도 대화장은 봉평장보다 크고 장사가 잘되는 장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은 사실이다. 대화면은 평창군의 중간 지점에 있다. 조선 시대에 대화면은 강릉에서 한양 가는 간선 도로가 통과하기 때문에 봉평보다 컸다. 봉평은 간선도로에서 벗어난 외진 동네였다. 대화면은 1975년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 강릉에서 서울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상업이 크게 번성했던 곳이다. 영월, 평창, 정선의 곡물과 잡곡이 대화로 유통되었다. 대화의 특산물로서 산채와 고추가 유명했다. 특히 대화초는 껍질이 두꺼워서 가루가 많이 나오고 매운 것이 특징으로 서울 경동시장에서도 명성이 자자하였다.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을 통틀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우리 토박이말에는 이치를 밝히고 올바름을 가리는 일에 쓸 낱말이 모자라 그 자리를 거의 한자말로 메워 쓴다. 이런 형편은 우리말이 본디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머리를 써서 이치를 밝히고 올바름을 가리는 일을 맡았던 사람들이 우리말을 팽개치고 한문으로만 그런 일을 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있으면 말은 거기 맞추어 생겨나는 법인데, 그들은 우리말에 도무지 마음을 주지 않았다. 조선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이천 년 동안 그런 분들은 줄곧 한문으로만 이치를 밝히고 올바름을 가리려 했기에 우리말은 그런 쪽에 움도 틔울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노릇은 이처럼 애달픈 일을 아직도 우리가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치를 밝히고 올바름을 가리려는 학자들이 여전히 우리말로 그런 일을 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말이라야 우리 삶의 이치를 밝히고 우리 삶의 올바름을 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다. ‘슬기’와 ‘설미’는 그런 역사의 가시밭을 뚫고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이치를 밝히며 올바름을 가리는 몫을 해 주는 우리 토박이말이다. ‘슬기’는 임진왜란 뒤로 가끔 글말에 적힌 덕분에 무서운 한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답사 날자: 2024년 5월 27일(월) 답사 참가자: 김수용, 김혜정, 윤석윤, 이상훈, 전선숙, 최동철 (6명) 답사기 쓴 날짜: 2024년 6월 3일 효석문학100리길의 제3구간은 대화 땀띠공원~방림농공단지다. 평창군에서 만든 소책자에서는 이 길의 이름을 ‘강따라 방림 가는 길’이라고 이름 붙이고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굽이치는 대화천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금당계곡이 합류된 평창강을 따라 고봉과 절벽이 조화된 멋진 경관을 연출하고 있는 구간으로 주변경관을 조망하며 강변을 따라 걷는 길이다. 특히, 제3구간은 제방길과 강변길로 이루어져 있어 자전거 투어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주변의 산과 계곡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자연의 정취와 멋진 풍경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길이다. 제2-2구간의 도착지가 제3구간의 출발지가 된다. 땀띠공원은 지하수가 솟아 나오는 작은 연못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연못의 유래에 대해서 돌비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땀띠물 由來 이곳 땀띠물은 그 名稱이 언제부터 유래된 것인지 文獻에는 기록이 없으나 옛부터 마을 주민들은 이곳을 찾아 몸을 씻으면 땀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쉬다’와 ‘놀다’는 싹터 자라 온 세월이 아득하여 뿌리를 깊이 내렸을 뿐만 아니라 핏줄이 본디 값진 낱말이다. 핏줄이 값지다는 말은 사람과 삶의 깊은 바탕에서 태어났다는 뜻이고, 사람이 목숨을 누리는 뿌리에 ‘놀다’와 ‘쉬다’가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의 삶에서 그처럼 깊고 그윽한 자리를 차지한 터라 여간 짓밟히고 버림받아도 뿌리까지 죽어 사라질 수가 없는 낱말인 것이다. ‘쉬다’는 ‘움직이다’와 짝이 되어 되풀이하며 사람의 목숨을 채운다. 엄마 배 안에 있을 때는 ‘쉬다’와 ‘움직이다’를 아주 잦게 되풀이하다가 태어나면 갑자기 되풀이가 늘어진다. 늘어진다 해도 갓난아기는 하루에 여러 차례 되풀이를 거듭한다. 배고프면 깨어나 울면서 움직이다가 젖을 먹이면 자면서 쉬는 되풀이를 하루에도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예닐곱 살을 넘어서면 드디어 하루에 한 차례 ‘쉬다’와 ‘움직이다’를 되풀이한다. 되풀이는 해가 뜨고 지는 것에 맞추어 밤이면 쉬다가 낮이면 움직인다. 이처럼 몸 붙여 사는 환경에 맞추어 되풀이하던 ‘쉬다’와 ‘움직이다’가 멈추면 사람의 목숨도 끝난다. ‘쉬다’와 ‘움직이다’는 삶에서 맡은 몫도 서로 짝을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아침 10시 15분 무렵, 대화성당에 다니는 전아폴로(아폴로는 아폴로니아의 준말로서 세례명임) 자매가 쉬어가자고 하면서 준비한 간식을 꺼낸다. 자매님은 오이를 썰어서 플라스틱 통에 담아왔다. 우리는 싱싱한 오이를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다. 먹는 사람이야 오이 한 조각이지만 준비한 사람의 정성이 고마웠다. 대화천 물가에는 노란 유채꽃과 애기똥풀, 그리고 하얀 당근꽃 등이 많이 피어 있었다. 때때로 엉겅퀴, 지칭개, 매발톱꽃도 보였다. 이제부터 여름을 거쳐 가을 서리가 내리기까지 들판에는 온갖 꽃이 계속 피어날 것이다. 하천 따라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니 왼쪽에 고대동교라는 이름의 다리가 나온다. 오른쪽 산길로 올라가면 법장사라는 절이 나온다. 절 왼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가면 거문산에 오를 수 있다. 나는 몇 년 전에 친구들과 이 길을 따라 거문산과 금당산을 등산한 적이 있다. 이틀 후인 5월 15일(음력으로 4월 8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어서 다리에서부터 연등이 걸려있다. 다리 앞쪽에 넓은 공간이 있고 잘 지어진 정자가 있다. 정자의 현판에는 ‘허생원이 머물던 곳’이라고 한글로 쓰여 있다. 허생원은 소설 <메밀꽃 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