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라 카페 갤러리에서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 카슈미르의 봄이 열리고 있습니다. 카슈미르라면 요즘도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영토 분쟁이 있는 곳 아닙니까?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할 때, 카슈미르 지도자 하리 싱이 대부분이 이슬람교도들인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인도에 붙음으로써 분쟁이 시작되었지요. 그 동안 박 시인은 팔레스타인, 쿠르드, 인도네시아 아체 등 분쟁과 슬픔이 있는 땅을 찾아다니며 그곳에 평화와 나눔을 전해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삶을 사진에 담아 전시회도 여러 차례 열었는데, 이번에는 카슈미르를 사진에 담아오셨군요. 박 시인은 디지털이 대세인 요즘도 아날로그 사진에 시인의 감성을 담습니다. 그것도 주로 무채색의 흑백 사진으로 담아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박 시인의 무채색 아날로그 사진에서 시인의 감성을 읽어내고, 박 시인의 사진을 빛으로 쓴 시라고 부르곤 합니다. ▲ 히말라야의 눈물, 카슈미르 (사진 박노해 시인) 시인은 무굴제국의 황제 제항기르가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카슈미르가 바로 그곳이다.라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땅이 인간의 욕심에 의해 슬픔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신영복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지난 금요일(1. 15) 밤에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받고 순간 멈칫하였습니다. 그 일주일 전에 선생님의 건강이 위중하셔서 예정된 동계특강이 취소되었다는 문자를 받았을 때만 하여도, 그래도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줄 알았는데 끝내 머나먼 길을 가셨네요. 아직은 저희 후학들이 선생님께 배워야 할 것이 많은데...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수의 삶을 살다가 1988년 광복절에 다시 세상의 빛을 보신 분, 감옥에 있는 동안 엽서나 휴지에 깨알 같이 쓴 글을 모아 출간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주셨던 분. - 신영복 선생님을 기억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를 먼저 떠올리실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 신영복 선생의 붓글씨가 내걸린 선생의 분향소 저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정작 제가 먼저 선생님의 세계를 접한 것은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 책부터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는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다가 구속되어 20년을 감옥에서 살고 나온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남대문시장에 가면 남대문로에 접하여 복잡한 시장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하얀색 12층 건물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4층까지는 새로나 백화점이 들어서 있고, 그 위로는 상동교회지요. 상동교회의 내력을 잘 모르는 분은 왜 이리 복잡한 시장통에 교회가 들어서 있지? 할 수도 있겠습니다. 상동교회는 1888년(고종 25) 스크랜튼 선교사가 세운 교회입니다. 스크랜튼 선교사가 의료선교를 위하여 한성부 회현방 상동(尙洞)에 터를 구입하여 약국과 병원을 차리면서 오늘의 상동교회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벌써 교회 역사가 127년이나 되었네요. 그러니 남대문시장이 상동교회 보고 왜 남의 구역에 들어와 장사 방해하느냐?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상동교회는 단순히 역사 오랜 개신교 교회라는 것에만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동교회는 일제의 침략에 당당이 맞서 싸운 독립운동의 산실이기도 합니다. 당시 상동교회에서 믿음과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 전덕기(1875~1914) 목사입니다. 전덕기는 스크랜튼 선교사에게 감화를 받아 1896년 세례를 받고 상동교회에 입교하였습니다. ▲ 190년대의 상동교회(완쪽), 상동교회를 독립운동의 산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무후묘를 아십니까? 무후는 제갈공명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러니까 무후묘(武候廟)는 제갈공명을 모신 사당입니다. 그런데 무후묘가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물론 공식적으로 국가가 관리하는 사당이 아니라 민간신앙에서 출발한 사당이지요. 주택가 한가운데인 보광동 419번지에 무후묘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 전에 아버님 댁에 간 김에 가까이에 있는 무후묘를 찾아보았습니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복잡한 골목길을 이리 저리 돌아가니, 눈앞에 한옥집이 보이고 대문에는 보광사, 무후묘 제전위원회라는 현판을 걸어놓았네요. 내비게이션이 없었으면 이 복잡한 골목길을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았어야 하는데, 요즈음은 내비게이션에 주소만 입력하면 걸어가면서도 길을 안내해주니까 참 편합니다. ▲ 무후묘 정문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작은 마당 저편에 조그만 사당이 있고, 옆에는 일반 주택이 바짝 붙어 있습니다. 아마 저 주택에 거주하는 스님(?)이 보광사를 운영하면서 무후묘도 관리하는 모양입니다. 제가 마당에서 무후묘 사진을 찍고 있으니, 주택에서 사람이 나와 안에도 볼 테면 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들여다보고 싶긴 하였지요. 그렇지만 괜히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지난 11월 4일 건국대 새천년관 대공연장에서 러시아 타타르스탄 국립전통오케스트라 초청공연을 보았습니다. 타타르스탄은 러시아 내 타타르스탄공화국을 말합니다. 타타르스탄 공화국이라면 러시아에 관심 있는 분이 아니라면 대부분 생소할 것입니다. 타타르스탄 공화국은 몽고족의 후예인 타타르인들의 공화국입니다. 칭기즈칸이 세계를 정복하였을 때 러시아 지역에는 킵차크한국이 자리 잡지 않았습니까? 15세기에 그 킵차크한국이 쇠퇴하면서 몽고족의 한 일파가 카잔 일대에 카잔한국을 세웠는데, 이 카잔한국도 1557년 모스크바공국의 이반 4세에게 점령당하여 멸망하지요. 그러던 것이 1920년 카잔을 수도로 하는 타타르스탄 공화국이 생겨 과거 타타르인의 전통을 이어가게 된 것입니다. 카잔은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710여km 떨어진 곳으로, 2018년 월드컵이 카잔에서 열립니다. ▲ 타타르스탄 국립전통오케스트라 연주 모습 ▲ 콘트라베이스 역할을 하도록 크게 만든 악기, 바스 발랄라이카(Bas Balalaika) 타타르스탄 오케스트라는 이번에 타타르스탄공화국의 루스탐 민니하노프(Rustam Minnikhanov) 대통령의 방한에 맞추어, 한러
▲ 《그들이 사는 마을》, 스콧 새비지 엮음, 느린 걸음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어느 날 문득 내가 왜 이렇게 살지?라고 생각해보신 적 없으십니까? 기계문명의 거대한 흐름에 밀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남들이 가는 대로 자신도 따라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흠칫 놀라신 적은 없으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느꼈을지라도, 이 거대한 흐름 앞에 한 개인이 뭘 어찌 하겠느냐는 체념 속에 그저 묵묵히 흐름을 따라 갈 것입니다. 아니, 그 흐름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다시금 그 흐름 속에서 경쟁하며 탐욕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그런 흐름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나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콧 새비지가 엮고 느린 걸음 출판사에서 낸 책 《그들이 사는 마을》이 바로 그런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그들이 사는 마을》은 미국의 비영리단체 소박한 삶을 위한 모임에서 발행하는 잡지 《플레인(Plain)》에 실린 글을 위 잡지의 편집자 스콧 새비지(Scott Savage)가 엮은 책입니다. Plain이란 단어 자체에 소박한의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사는 마을이란 바로 이런 흐름을 떨쳐버리고 나온 사람들이 소박하게 사는 마을을 뜻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에 광명 케이티엑스(KTX) 역 뒷산인 서독산 기슭에 있는 이순신 장군 무덤을 찾았습니다. 제가 이 말을 하면 다들 어? 이순신 장군 무덤이 광명에 있나?라고 하실 것입니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 무덤은 당연히 현충사가 있는 아산에 있겠지요. 제가 찾은 무덤은 무의공 이순신(李純信) 장군 무덤입니다. 그러면 무의공 이순신 장군은 또 누구야?라고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의공은 충무공 휘하 장수로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바다에서 왜군과 싸운 장수이지요. 그러니까 한 부대에 동명이인이 있었던 겁니다. 전부터 충무공 이순신 장군 휘하에 이름이 같은 이순신 장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그 이순신 장군 무덤이 서독산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이번에 찾은 것입니다. 무의공은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1577년(선조 10)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방답진 첨절제사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충무공 휘하에서 중위장, 전부장 등의 직책을 맡아 한산도, 옥포, 부산포, 당포해전 등에서 활약을 하였습니다. ▲ 광명 케이티엑스(KTX) 역 뒷산인 서독산 기슭에 있는 이순신(李純信) 장군 무덤
▲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 종가(김영조, 얼레빗)》 표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김영조 소장이 이번에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 종가》라는 책을 냈습니다. 김소장은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라는 메일을 벌써 12년째 하루도 쉬지 않고 보내고 있습니다. 저도 그 독자 중에 한 사람이지요. 그뿐만 아닙니다. 김소장은 우리문화신문이라는 인터넷 신문(http://www.koya-culture.com/) 편집자로 독자들에게 한국문화 알리느라고 매일 매일 바쁜 하루를 보냅니다. 그렇게 사명감으로 바쁘게 살아가시는 분이 이번에 모처럼 틈을 내어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 종가》라는 책까지 내셨네요. 김 소장은 2013년부터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 종가를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또 하나의 사명감에 전국의 명문 종가를 찾아 나섰습니다. 반만년 역사 오랜 우리나라에 종가는 많지만 김 소장이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 종가로 세운 기준은 이렇습니다. 1. 재물을 나눠 배고픈 이웃을 구휼했는가? 2. 재물을 쏟아 교육으로 베풀었는가? 3. 모든 것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바쳤는가? 김 소장이 이런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오케스트라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카라얀, 번스타인 등 오케스트라 지휘자 한 두 명의 이름은 기억할 것입니다. 그런데 똑 같은 곡이라도 어느 지휘자가 지휘하느냐에 따라 곡의 느낌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은 느껴보셨습니까? 물론 음악 애호가들이야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고 하시겠지만, 보통 사람은 특별히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그저 수동적으로 음악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김남윤 클래식 투어 3기 네 번째 강의에서 김남윤 W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 이러한 다양한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모습들에 대해 얘기해주고, 또 그들이 지휘하는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지금이야 오케스트라에 지휘자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최초의 전업 지휘자는 17세기의 장 바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 1632 ~ 1687)랍니다. 륄리 이전에는 보통 그 곡을 직접 쓴 작곡가가 지휘도 했다는군요. 륄리는 정확한 템포와 리듬을 맞추기 위해서 긴 지팡이로 바닥을 쿵쿵 두드리면서 지휘를 했답니다. 그런데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더니, 륄리도 믿는 지팡이에 발등을 찍혔네요. 물론 속담처럼 남한테 배신당했다는 것이 아니라,
▲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 이윤옥, 인물과사상사 책 표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추적하여 이를 시로 승화시킨, 그리하여 이를 <서간도에 들꽃 피다>라는 시리즈로 책을 낸 이윤옥 교수가 이번에는 《창씨 개명된 우리 풀꽃》이란 책을 냈습니다. 한동안 여성 독립운동에 천착하던 이교수님이 이번에는 어떻게 풀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교수는 책을 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몇 해 전 봄날, 벗에게 앙증맞은 들꽃 사진 하나를 슬기전화(스마트폰)로 받았다. 은은한 푸른빛의 어여쁜 이 들꽃 이름이 ‘큰개불알꽃’이라는데 놀랐다. 누가 이름을 붙인 것인지 참 안 어울린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일본 말 이누노후구리(犬の陰囊)를 옮긴 이름이었다. 맙소사! 올해로 일본어를 공부한 지 37년째, 고전이 전공인 내가 팔자에 없는 풀꽃 이름에 매달리게 된 것은 큰개불알꽃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교수님 참 대단하십니다. 우리의 예쁜 풀꽃들의 이름이 일본말로 창씨개명 되었다고 하니까, 곧장 도서관으로 달려가 식물도감을 뒤지면서 일본말에 오염된 우리 풀꽃들을 찾기 시작하다니요. 그런데 이교수가 이렇게 도서관을 뒤졌는데도 화려한 사진